현장에서 만난 사람 3편
'특별하지 않다'는 박두서 어르신의 특별한 삶

 

많은 사람들이 천리마택배 최고의 '패셔니스트'로 박두서 어르신을 꼽는다. 70대 중반을 넘긴 나이임에도 밝은 톤의 주황색이나 초록색 바지를 입는데도 튀어 보이지 않고 무난하다. 그 바지 위에 체크무늬의 셔츠를 입고 머리 위에는 밀짚모자를 꾹 눌러쓴 모습이 야무지고 당당해 보이기까지 한다. 박두서 어르신은 "그냥 집사람이 집어주는 대로 입는 거예요."하고 겸손해 하시지만, 오랜 시간 동안 몸에 밴 남다른 감각이자 옷매무새가 분명하다. 기자가 옛날 TV 만화 영화 <은하철도999>의 철이를 닮았다고 하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가라앉을 즈음 인터뷰를 제의하자 어르신은 손사래부터 치셨다.

 

"내가 워낙 특별나지 않고 심심하게 살아놔서, 남에게 들려줄 말이 없는데…."

 

하지만 기자가 어르신들이 살아오신 내력을 듣고자 하는 데는 어떤 교훈적이거나 특별한 삶을 찾고자 하는데 있지 않다고 조르자 다소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기꺼이 응해주셨다.

 

 

어르신의 고향은 서울 서촌의 누하동이다. 지금은 그런 구분이 없어졌지만, 기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진짜' 서울 사람은 사대문 안쪽의 출신만을 일컬었다. 그 중에서도 경복궁 주변으로 장소를 축소시키면 이른바 '뼈대 있는' 가문이라는 통념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기도 했다. 물론 박두서 어르신은 이런 기자의 설명에 고개를 흔들었다.

 

"이 개명천지에 뼈대는 무슨 뼈대에요. 고리타분하게스리…."

어르신의 유년을 압도한 기억은 그 연세의 어르신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한국전쟁이었다. 어르신의 가족은 일사후퇴 때 피난길에 나섰다. 다섯 살이었던 어르신은 아버지의 등에 업혀 서울을 떠났다. 대전쯤이었을까? 기차 지붕에 얹혀 가는데, 친척을 찾아 잠깐 아버지가 내린 사이에 기차가 갑자기 출발해버렸다. 황망하게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어린 어르신은 지붕에 남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허겁지겁 김천에서 내렸다. 꾸렸던 피난 짐도 북새통 속에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생면부지의 땅에서 생계가 막막해진 것이다. 어머니는 특유의 강인한 생존 본능으로 구걸까지 불사하며 식구들을 지켜냈다. 하지만 배고픔이 일상인 날들이었다. 다행히 수완이 좋으신 아버지가 어찌어찌 수소문하여 김천으로 찾아와 그야 말로 극적인 상봉이 이루어졌다. 이후 부산에서 2년, 대전에서 2년을 살고 다시 누하동으로 돌아왔다.

 

 

학업을 마치고 여행사에 들어갔다. 여행에 관심이 많아서였다. 70년대 당시로서는 사회적 인식이 생소한 직업이었다. 이후 여행 업무는 천직이 되어 은퇴할 때까지 30여 년을 여기에 몸담게 되었다. 78년에는 결혼을 했다. 여동생 친구가 아내가 되었다. 재미있는 사연이 있을 듯했지만 어르신은 예의 '특별하지 않은' 통상적인 남녀의 만남이라며 웃었다. 여행사에 근무하는 사람답게 신혼여행도 자세한 일정을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배낭을 메고 떠났다. 무주 구천동을 돌아 여수를 거쳐 남해안의 오지만을 돌아 부산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십여 일의 여행이었다. 당시로서도 그렇지만 요즈음에 비추어서도 특이한 신혼여행이 아닐 수 없다. 

해외여행 자유화 시행으로 여행 반경이 넓어졌다. 어떨 때는 직업인 여행 가이드로, 어떨 때는 순수 여행자로 동남아 지역을 샅샅이 훑으며 역마살의 삶을 살았다.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지금도 여행은 어르신의 삶의 일부분이라고 한다. 먼 곳으로 가기보다는 가까운 산을 오르는 등산에 음악 감상이라는 정적인 취미가 더해졌을 뿐.

 

 

 

 

 

 

자식은 딸과 아들, 두 명을 두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특별히 강조한 어떤 철학 같은 것을 묻자 이번에도 손을 흔들며 "특별한 거 없어요."라고 하신다.

 

"저와 아내는 자식들이 하는 일에 되도록 관여치 않으려 했습니다. 무관여의 원칙이라고나 할까요? 어차피 부모가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고 자기 인생 자기가 사는 거잖아요. 부모 세대와는 다른 시간을 사는 젊은 자식들에게 옛날 방식을 들이대서 뭐에 쓰겠습니까?"

 

그러나 자식을 키워본 사람은 안다. 자식이 하는 일에 관여하는 것보다 관여치 않는 게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가를. 어르신의 무관여는 무관심과는 다른 것으로 자식들의 생각과 선택을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녀들은 어르신의 기대대로(?) 성장하여 독립된 가정의 주체로, 어르신의 표현대로 '특별하지 않은', 그러나 건강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한다.

 

세상에 똑같은 삶은 없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삶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박두서 어르신처럼 살아가는 게 그 자체로 소중한 것임을 자각하는 사람들에게 삶은 보편적인 평균치일 수 없고, 언제나 특별한 법이다.

 

마지막으로 지금 하시는 택배 일이 어떠시냐고 묻자 "배달도 짧은 여행 아니냐."며 웃으셨다. 매일 하는 여행이 흥미진진하시다고. 택배와 여행의 연결이 기발해 보였다. 그렇게 여전히 박두서 어르신은 특별하게 사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