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한 청춘들의 노련한 도전을 위한 문래창작촌 탐사

 

대선으로 휴일이 되어버린 화요일 오후, 문래공원 정자 주변으로 특유의 하이파이브(손뼉맞장구) 환대를 주고 받으며 사람들이 모여든다. 지긋한 나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곤 꽤나 다양해 보인다. 이 분들을 ‘지긋한 청춘’으로 부르는 정광필 학장님의 말씀이 묘하게 일치된다. 멀리보이는 희긋한 머리카락으로는 누구라고 특정하기 애매한 연배이나 ‘와글와글’ ‘하하호호’ 느껴지는 생동감은 딱 청춘의 기운이다. 여기 왜 모였을까? 궁금함이 든다.

 

약속한 전원이 도착하였음을 확인한 후 일행은 다음 장소인 <갤러리 SAY>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주2병으로 자신을 소개한 이소주 대표로부터 문래창작촌의 형성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를 전해 들었다. 문래창작촌은 고만고만한 철공소들이 모여 있는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3가를 중심으로 2003년부터 형성된 도심의 이색마을로서 장인의 에너지와 예술가들의 창작열이 공존하는 곳이다. 2000년대 들어 그 많던 철공소가 빠져나간 자리에 홍대나 대학로 등지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이 알음알음 찾아와 작업실을 만들면서 형성된 곳이다. 3곳 정도의 작업실로 시작되어 지금은 작업실 150여개, 예술가 300여명이 활동하는 소위 ‘뜨는 동네’가 되었다. 창작촌 소개를 마친 이대표께서 ‘처음 열정을 쏟아 붓고 나면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가 쉬운 예술가들이 문래동에서 꾸준하게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관계의 중심이 되어준 분’이라며 최영식님을 소개하였다. 이어진 최영식님의 인생2막 얘기는 모두를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인생2막 경험을 들려주는 <최영식님>

 


▲문래창작촌을 소개하는 <이소주님>

 


 

2010년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면서 그의 인생2막이 펼쳐졌다. ‘단 한 번도 시간의 주인이 나였던 적이 없었는데 퇴직을 하니 오롯이 왕은 나’라는 철없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을 시작으로 퇴직 후 무너져 내린 자존감은 마치 경제적, 사회적으로 거세된 느낌이었노라 담담히 얘기하는 그에게서 퇴직 후 치열했던 전환 과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우연하게 참여한 교육이 계기가 되어 오늘 날 문래동 마당발이 된 그의 인생후반 여정은 매우 흥미로웠고 시사하는 바가 컸다. 딸과 비슷한 나이의 젊은 예술가들로부터 늘 청춘인 ‘늘청씨’로 불리워 지는 최영식님의 인생2막 이야기까지 듣고 난 후 50+인생학교 교육생들은 대여섯명씩 조를 나누어 본격적인 문래창작촌 골목 탐사에 나섰다.

 


 

 

 

철강업이 번성하던 때 만들어진 오랜 철공소에서 들리는 쇠 깍는 소리를 음악 삼아 골목을 걸었다. 뒷골목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반전 있는 공간이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챈다. 문래도시텃밭, 개성 뿜는 갤러리와 카페, 게스트하우스. 작가들의 작업장, 장인의 위엄이 느껴지는 철공소 등이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골목길에서 마주하는 표지판과 그림 등을 발견하는 일도 제법 재미있다. 비 오는 날임에도, 커피 한잔이 아쉬워 들어간 곳곳의 카페에는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넘쳐난다. 제법 시간이 흐르고 탐사에 나섰던 50+인생학교 교육생들께서 다락방이 있는 마을카페 ‘수다’로 속속 모여든다.

 

잠시 후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를 무대삼아 문래창작촌 탐사 소회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를 요약하여 전해 본다.

 

‘문화관광산업으로 발전시켰으면 좋을 것 같다. 예술과 철의 공존으로 과거와 미래가 공존한다’

 

‘녹물로 만든 창작물을 보면서...녹도 멋진 창작물로 거듭나고 쓸모가 있는데

인생이모작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도 쓸모 있고 멋진 리모델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곳에서 희망을 본다.’

 

‘철강업에 종사할 때 영업차 자주 들렸던 곳을 다시 오게 되었다.

예전에는 철만 보였다. 체스판의 흰 부분과 검은 부분이 있는데 그 중 검은 부분만 본 것 같다.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 했다.

오늘 산업과 예술이 공존하는 문래동을 돌아보면서 씨줄과 날줄이 엮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함께 볼 줄 아는 힘. 공존함이 새롭다.’

 

‘젊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창작을 하지만 막상 소비자와의 연결은 쉽지 않아 힘겨운 것 같은데,

가능하면 우리가 많이 사 주자!. 청년의 삶도 우리 50+세대가 살펴줘야 하지 않을까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쇠 가루 날리는 동네라 가까이 있어도 한번 와보지 않았는데...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라 놀랐다.

옛날 어릴 적 골목 생각도 나고 인심도 후한 것 같다.

부동산에도 잠시 들렀는데 매물이 없다고 하더라.’

 

자녀 돌봄을 졸업하고 진지하게 나를 찾아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 문래동의 젠트리피케이션을 걱정하는 분, 부동산 투자 가치를 논하는 분, 공예를 전공한 딸은 두어 젊은 작가의 생계가 남 일 같지 않은 분 등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소회 나눔에서 50+세대의 생각을 엿본다. 소회를 나누는 가운데 아주 인상적인 분이 계셨다. 잘 나가던 철강회사 영업맨으로 수 없이 문래동 철공소 단지를 오갔다던 그 선생님의 말씀이 오래도록 남는다.

 

우리나라 철강산업을 일으켰다는 자부심을 꼿꼿하게 간직한 채 철공소와 함께 나이 들어간 60대 장인들과 생계 위협에도 자신만의 창작세계를 고수하며 나답게 살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이 공존하는 오늘의 문래동에서 ‘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생각하게 된다.’라며 담담하게 전한다. 해외 철강회사에 재취업 되어 다음 달에 미국생활을 시작하신다며 ‘50+인생학교 수강 경험은 짧았지만 강렬했고, 새로운 경험이었다며 이전과 같은 일을 하게 되었으나 이미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다’라며 50+인생학교 동료들이 만들 커뮤니티의 최초 해외회원으로 계속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는 깜짝 고백을 하셨다.

 

50+인생학교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나선 여행길에서 각 자가 찾고 싶어 하는 해답에 한 발짝 다가가는 오늘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글/ 기획홍보실 홍현희 · 사진/ 이미지메이커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