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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서 첫 문장을 쓰고 다시, 모스크바에서 마지막 문장을 쓴다. 창으로 보이는 하늘에는 회색구름이 몽글몽글하다. 낯익으면서도 낯익지 않은 수많은 도시를 거쳐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한다. 무엇이 나를 이곳까지 이끈 것일까. 도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지나쳐 온 모든 도시마다 처음 마주한 이야기들은 장면 혹은 상징으로 그리움이 되어 남는다. 멀리 산등성이 너머로 저물어 가는 마지막 햇살, 아득히 먼 곳에서 빛나는 별빛 같은 것들, 가까이 다가가면 신기루처럼 사라지던 하얀 밤들은 신비한 어휘로 이루어진 하나의 페이지가 된다. 오슬로, 뮈르달, 트론헤임, 보되, 외스테르순드, 상트페테르부르크…… 때때로 다양한 사람들이 배경이 되고 도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내가 가진 언어로는 묘사해낼 길이 없는 그들의 따뜻한 체온과 아름다운 풍경들은 나를 종종 멈춰 서게 한다. 어디선가 불어 온 바람을 타고 희끄무레한 구름이 피어오른다.

 

여름 한 철, 길 위를 떠돌았다. 멀고도 먼 도시와 도시를 이어 서사를 만들고 지도에 있던 장소들을 찾아 두 발로 써내려갔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렀다. 알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고 오직 형편없이 쓰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분명했다. 이어붙이고 잘라내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는 동안, 세상 모든 것들은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벌레 먹은 잎사귀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 은은하게 울러 퍼지던 종소리, 우툴두툴한 돌멩이, 혀끝에 닿던 음식들의 낯선 맛과 골목마다 배어나던 냄새들이 은유로 확장된다. 도시를 옮겨갈 때마다 삶을 리셋한다. 집요하게 이전의 기억을 지우며 어제와 다른 오늘을 갈망하기도 하지만 번번이 진부한 서사를 오갈 뿐이다. 어디어디를 여행했는지, 앞으로 어디를 돌아다닐지는 독자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무릇 반전이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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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서 마트료시카(Матрёшка, 나무로 만든 러시아의 인형)를 만났다. 가게마다 헤집고 다니는 동안 마트료시카를 고르는 팁이 생겼다. 명품과 짝퉁을 알아내는 비법에서 디테일을 구별해내는 안목이 깨알같이 쌓였다. 인형 속에 인형이 많이 들어있을수록 좋다. 다섯 개가 들어있기도 하고, 많으면 열 개 이상이 들어있기도 하다. 심지어 스무 개가 들어 있는 것도 있다. ‘설마, 또 들어있을까하며 인형의 배를 손톱으로 하나하나 갈라보면 대박!”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감탄을 한다.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생겨나는 소설과 닮은꼴이다. 그 정도의 구성이 해결되면 이제부터 디테일이다. 인형의 색이 잘 칠해졌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큰 인형부터 작은 인형까지 색깔이 정교하게 칠해져야 하고 아무리 작아도 눈, , 입의 표정이 살아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글을 쓸 때 역할 비중이 낮다고 인물을 대충 그려서는 안 되는 일과 똑같다. 인형의 배를 가를 때는 위쪽과 아래쪽을 이어주는 이음새가 매끈해야 한다. 부자연스러운 연결은 부드럽게 분리도 되지 않을뿐더러 억지로 빼면 망가지기도 한다. 눈치 챘겠지만, 이러한 결론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터득한 나만의 비법이다. 하물며 이야기를 펼칠 때 연결고리를 자연스럽게 만들어야 하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목각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중첩된 이야기들이 새로운 호기심까지 불러준다면 금상첨화이다. 아라바트(Арба́т)거리에서 마음에 쏙 드는 마트료시카를 찾았다. 여행 가방에 들어갈 만한 크기의 인형을 사 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아주 훌륭한 작법서가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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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나에게 여행이고, 낯선 세계와 인물을 만나는 경험이다. 바꿔 생각해보면 여행은 출발지로 돌아오는 것을 전제로 떠나는 글쓰기이다. 도입과 결말이 수미상응하는 호텔방 순백색 시트 위에서 나는 다시 세상과 맞설 에너지가 충전된다고 하면 과장처럼 들릴까.

 

낡은 여행 가방을 끌고 집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른다. 저물어 가는 태양이 구름 위로 빛을 흩뿌린다. 온갖 색채가 혼재하는 부드러운 반사광이 대기에 가득 차더니 드넓은 하늘을 무심하게 떠다닌다. 더는 볼 수도 없고 들리지도 않는다. 멀리 달아나버린 잠의 너머로 두 눈을 감은 채 나는 생각해본다. 내가 아는 언어로 저 빛들을 묘사할 수 있을까. 보나마나 잿빛, 푸르스름한 흰 빛, 광택 없는 노란 빛, 마침내 빛이 없는 빛……납득할 수 없는 것들로 펄럭일 뿐이다. 나는 창의 덧문을 반쯤 닫으며 현실의 시간을 밀어낸다. 내가 사랑했던 도시들 위로 창조된 허구의 공간이 뒤섞이며 한 편의 소설이 끝나고 있다.

 

 

50+에세이작가단 김혜주(dadada-boo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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