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에서 만나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사랑

 

사랑과 슬픔은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요소다. 영화나 소설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도심에서 이런 슬픈 사랑 이야기를 만난다면, 지친 도시민의 마음을 녹여 낼 수 있지 않을까? 서울 도심 동묘거리는 단종과 그의 아내 정순왕후의 슬픈 사랑 이야기로 가득한 곳이다. 단종은 조선의 임금 중 가장 비극적인 왕으로 기억된다. 위대한 임금 세종을 할아버지로 두고 학문을 좋아했던 문종을 아버지로 두었던 단종은, 총명했고 사랑받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아버지 문종이 즉위 2년 3개월 만인 39세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12세에 왕이 된 단종은 신하들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고, 곧 계유정란이 일어나 삼촌 수양대군이 권력을 장악한다. 계유정란은 주요 대신들이 안평대군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거짓 역모를 꾸며, 수양대군 측이 이들을 모두 제거한 사건이다. 

 

계유정란이 일어난 1년 반 후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수강궁(지금의 창경궁)으로 물러난다. 하지만 이듬해 일어난 집현전 학자들의 단종 복위 사건으로 단종은 결국 영월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 달 뒤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발각된다. 결국 단종은 이 사건으로 17세의 어린 나이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정순왕후의 운명 또한 단종의 비극과 닿아있다. 수양대군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으나,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의덕왕대비가 되었다. 세조 3년, 단종 복위 운동 실패로 단종이 영월로 유배될 때 정순왕후는 군부인으로 강등되었고 둘은 헤어진다. 의지할 데 없는 어린 임금에게 그녀는 아내 이상의 존재였을 것이다. 짧았던 사랑에 비해 이별은 길었다.

 

영도교(좌), 동망정(우)

 

단종이 영월로 떠날 때 정순왕후는 청계천 영도교까지 따라 나왔다고 한다. 영도교는 동묘에서 가장 가까운 청계천 다리다. 이곳에서 눈물로 이별한 두 사람은 이생에서 다시 만나지 못한다. 후세 사람들은 영도교를 영영 이별한 곳, 영 이별 다리라 불렀다. 이후 정순왕후는 궁녀와 시녀 다섯과 함께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정업원에서 생활하였다. 정업원은 왕가에서 관리하던 절이다.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비구니절 청룡사가 바로 정업원이다. 정순왕후는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단종이 그리울 때면 뒤편 동망봉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며 울었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단종을 그리워하며 평생 무명옷만 입었고, 고기와 생선을 먹지 않았다. 단종의 제삿날에는 금식하며 남편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십대의 어린 나이에 만나, 오직 둘만을 의지하며 서로 정을 주었기에 그 사랑이 얼마나 간절했을까. 정순왕후는 남편의 못 다한 삶까지 살려했을까. 그녀는 82세로 세상을 떠난다.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세조뿐 아니라 예종, 성종, 연산군의 죽음을 보면서 인생의 허무를 느꼈을 것이다. 

 

청룡사(좌), 남양주 사릉(우)

 

두 사람은 죽어서도 서로 만나지 못했다. 단종의 무덤은 영월의 장릉에, 정순왕후는 남양주 사릉에 모셔져 있다. 사릉의 소나무들은 영월 쪽을 바라보며 자란다고 한다. 단종에 대한 그녀의 그리움이 얼마나 간절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살다보면 많은 슬픔과 아픔을 만난다. 하지만 이들 두 사람의 아픔만 하겠는가.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사랑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동묘 네거리로 나가 영도교를 거쳐 동망정 그리고 청룡사까지 걸어보는 걸 어떨까.

 

50+시민기자단 김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