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경_상단배너.png 

돌봄은 생존의 문제이다. 갓 태어난 신생아는 물론이고 질병이나 장애 또는 노화의 과정에서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인간은 돌봄에 의존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에 대한 돌봄과 가족을 비롯하여 타인에 대한 돌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일시적이든 항구적으로 돌봄을 필요로하고, 다양한 형태의 돌봄을 경험한다. 돌봄 대상자이면서 제공자인 각자가 보편적이고 순환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서로 의존하는 돌봄관계의 특성에 대해 학자들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본질적인 관계’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코로나19에 대한 펜데믹 선언 이후 감염병 확산의 공포와 함께 돌봄 공백의 미증유 상황을 경험하였다. 취약계층에게 더욱 가혹한 위기 상황은 돌봄의 재가족화를 촉발하였고, 일상의 삶과 돌봄이 무너지면서 긴급돌봄 체계를 절박하게 요구하기도 하였다. 즉, 인구구조의 변화와 맞물린 감염병의 위기를 경험하면서 돌봄의 역할과 의미는 더욱 확장되고 강력하게 우리 삶의 가까이로 다가선 것이다.

 

1차 베이비붐세대(1955~1963년생)와 대비되어 산업화의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포스트 모더니즘적 배경을 가진 세대라고 통칭되는 2차 베이비붐세대(1968~1974년생)의 개인주의적·탈권위적 가치관은 돌봄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까? 부모 세대가 가졌던 가족에 대한 맹목적 헌신과 의무감과 달리 ‘일-가정 양립’에 대한 양성평등 의식을 갖지만, 의식과 실제 행동의 차이로 인해 부부관계의 갈등을 초래하는 특징이 나타난다는 연구 결과들이 적지 않다. 한편 자녀양육과 교육에 대한 중시 경향으로 가계에서 사교육비 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고, 이에 따른 가계 부담이 큰 특징을 갖는 것으로 각종 실증 연구들이 밝힌 바 있다.

 

이들이 갖는 세대적 특징을 막론하고 중고령기는 돌봄관계에 있어 돌봄의 대상이 자녀 돌봄에서 노부모 돌봄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다. 따라서 2차 베이비붐세대들의 관점에서 저출산·고령화의 인구구조 변화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 증가로 노동시장 참여 형태가 변화하면서 노부모와 손자녀 또는 만혼·비혼의 성인 자녀 등 돌봄 대상자가 범위가 늘어났다.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노부모의 돌봄기간이 길어지고, 자녀의 경제활동 참여 지원을 위해 손자녀를 돌봐야 하는 부담도 일부 떠안게 된 것이다. 30~40대 미혼자의 절반가량이 주거비 부담 등의 이유로 부모와의 동거를 선택하는 ‘캥거루족’의 증가도 이들에게 남의 일로만 생각했던 ‘낀 세대(sandwiched generation)’의 일상을 현실로 경험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낀 세대의 일상에서 나타나는 중년기 이후 노부모와 성인 자녀, 손자녀 등 동거·비동거 여부와 상관없이 2세대 이상의 가족원에 대한 부양의 부담을 일컬어 ‘이중 부양’이라고 한다. 여기서 부양은 돌봄과 비교하여 보다 협의의 구체적 돌봄의 방식으로서 경제적·신체적·정서적·도구적 지원을 제공하는 일련의 행위를의미한다. 이중 부양은 돌봄의 대상이 확장되면서 부담이 배가되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객관적이거나 주관적 어려움, 사회적 고립감이나 과다한 역할수행의 부담, 가족 갈등, 심리사회적 스트레스, 만성적 피로와 무력감, 외로움, 우울, 신체적·정신적 소진, 전반적 삶의 질 저하 등 부정적인 연구 결과들을 낳고 있다.

 

실례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2019년 실시한 「신중년의 안정적 노후 정착 지원을 위한 생활실태조사」에서 50~69세 대상으로 가족 부양부담에 대한 인식을 질문하였는데, 우선 부모 동거 비율은 본인 부모와의 동거 비율이 8.1%, 배우자 부모와의 동거 비율이 4.6%였고 비동거 비율은 각각 91.9%(본인 부모)와 95.4%(배우자 부모)로 나타났다. 이에 따른 비동거 본인·배우자 부모에 대한 부양 부담 정도를 아래 그림에 제시하였다. 이중 부양의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들이 비동거의 노부모와 성인 자녀에 대한 도구적이고 경제적인 부양까지 부담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박세경1.png 

돌봄의 부담에 대한 실증적 결과물이 뒷받침하지 않더라도 돌봄 제공자로서의 경험은 단순 기술적 활동에 머물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면대면(面對面), 일대일의 관계에서 대상자와 제공자 간의 민감성(애정), 배려·존중·신뢰 등의 정서적 교감과 교류가 일어난다. 이러한 관계적 상호성으로 돌봄은 더욱 필수적이고 가치 있는 행위로 인식되는 것이다. 다만 서구 현대사회에서 돌봄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 귀결되지만, 한국에서 돌봄은 ‘개인과 개인’ 또는 ‘개인과 가족’ 그리고 ‘개인과 국가’ 등 다층적이고 복합적 관계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물론 개인과 가족에게 오롯이 남겨져 있던 돌봄의 과업은 경제사회의 발전과정에서 더는 비공식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다. 가족 가치관의 변화와 함께 가족구조와 기능이 변화하고, 여성의 유급 노동시장 참여가 증가하면서 돌봄 욕구의 사회적 충족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이 증폭되어 한국에서도 사회정책의 핵심 영역으로 돌봄 정책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돌봄을 이야기하지 않고 복지국가를 이해할 수 없고, 개인과 가족이나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본 원칙이면서 이를 판단하는 주요 지표 중의 하나로서 돌봄을 이해하고, 국가는 돌봄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돌봄 문제가 핵심 사회 의제로 등장하면서 이에 대한 정책적 대응은 국가들에 따라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는데, 이는 돌봄 정책이 비공식 영역의 돌봄을 단순히 기능적으로 대체할 뿐만 아니라, 돌봄 제공의 책임과 가치 그리고 돌봄에 대한 사회적·문화적 해석과 앞으로의 지향까지를 반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간의 돌봄 정책 논의는 주로 돌봄의 사회화에 따른 관련 서비스의 제도화 방안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보다 포괄적이고 전체주의적 맥락에서 돌봄의 가치와 의미를 재해석해 나가야 한다. 아울러 지금까지의 법·제도적 기반에 대한 진단과 분석을 시도하고 공식·비공식 영역의 돌봄에 대해 재정적·정책적으로 지원하는 방안 이외에도 사회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고 지지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려는 논의를 이전보다 활발하게, 보다 구체적으로 펼쳐 나가야 한다.

 

일반적으로 돌봄 정책은 돌봄에 투입되는 재정적·감정적 비용을 분담하기 위해 노동력에 대한 서비스 지원방식이나 비용 분담을 위한 수당지원 또는 돌봄을 위한 시간적 투입에 대한 휴가지원 등으로 유형화하고 있다. 서비스 지원을 위한 노인장기요양시설이나 어린이집에서의 돌봄서비스가 대표적이고, 가정양육수당 등은 대표적 수당지원 방식이라 하겠다. 출산휴가제도나 육아휴직제도는 시간적 지원의 형태인데, 돌봄의 사회화 정책이 확장되면서 가족에게 주어진 돌봄부담, 특히 이 시대의 중장년들에게 드리워진 이중 돌봄의 부담을 감당하거나 경감하기에는 그 관심과 지원이 역부족인 상황이다. 돌봄 정책의 기본 골격은 유급 노동시장에서의 고용에 가치를 강조하고 있었기에 한국적 정서에 뿌리 깊이 남은 가족중심의 돌봄은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화된 각종 돌봄서비스와 돌봄제도에도 불구하고 이중 돌봄의 부담, 자녀됨의 무게는 중년의 또 다른 위기로 다가오는 것이다.

 

2차 베이비붐세대가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이제 돌봄을 사회문제가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요소로서 인식하고, 비공식 영역과 공식영역이 단절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역할을 하면서 돌봄욕구를 충족해 나갈 수 있는 실효적 논의를 펼쳐야 한다. 돌봄 욕구는 빠르게 증가하고, 돌봄 욕구는 갈수록 다변화되고 있으니, 그 비용 부담 또한 가히 기하급수적으로 늘 것이다. 이는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부담이고 사회적으로도 돌봄 비용의 지속적 증가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낳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실효적 돌봄 정책은 이용자-제공자-공급자 3자가 함께 논의하고 합의하는 것을 전제로 「돌봄체계의 지속가능성과 돌봄의 존엄 및 품질에 대한 신뢰」를 돌봄 정책의 핵심 가치로 추진할 것을 제안한다. 돌봄서비스의 촘촘한 연계·협력을 통해 이용자 관점에서는 돌봄의 대상자와 그 가족이, 또 돌봄의 제공자와 공급자가 촘촘한 돌봄을 통합적으로 제공할 수 있도록 공공과 민간의 유연한 협력체계가 확보되어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돌봄의 이용자-제공자-공급자의 다양한 의견은 언제든지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이 필요하다. 정부는 돌봄 플랫폼을 통해 돌봄 3주체가 언제든지 소통하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참여의 장을 마련하고, 건전한 집단활동 수준의 관리와 모니터링이 되어야 하며, 재정지원이나 인센티브와 연계하여 이들의 다양한 의견과 평가는 수용되어야 한다.

 

아울러 돌봄의 대상자와 이용자 모두 인간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하는 돌봄 환경을 조성하고, 인권 및 권리의 형평성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전제해야 한다. 특히 돌봄환경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다른 어떤 환경적 조건에서 보다 강조되어야 한다. 한편, 상대적으로 돌봄 제공자의 노동 가치가 저평가되고 적절한 처우가 보장되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여 돌봄 노동자의 고충을 이해하고 사회적 인정과 적절한 보상체계를 마련하여야 이 모든 돌봄 논의가 가능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