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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책 제목에 중년이 들어가는 단행본을 공저로 출간했다. 모자란 거 투성이지만 내 눈엔 예뻐 보이는 그 아이가 세상을 만나가면서, 내가 이따금 씩 듣는 질문이 있다. ‘행복한 중년으로 살려면 가장 필요한 게 뭔가요?’ 그러면 주저 없이 자기만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답해준다. <그림에, 마음을 놓다>에서도 저자 이주은은 말한다, ‘자기만의 숨 쉴 공간을 만들어 놓자고. 그것은 물리적 어떤 공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내가 좋아하는 어떤 대상에게 마음껏 빠져드는 행위 등을 다 포함한다.

 

27년째 내 짝꿍 자리를 지켜온, 동갑내기 남편은 다행히도 숨 쉴 공간을 찾았다. 일에만 집중해온 남편이 오십 줄에 들어서면서 여자프로 배구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지방 원정 경기도 먼 길을 마다치 않는 그는 장충체육관에서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응원복까지 갖춰 입고 참관한다. 그런 날이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응원용 봉을 집어 든다. 이유는 바로, 당과 족발, 장충단공원! 그중 최고의 유혹자는 태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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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일 때나 쉰다섯 살일 때나 한결 같이 그곳에서 나를 맞이해 주는 빵집과 체육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빵집. 장충체육관에서 경기가 있는 날이면 빵집 앞은 긴 줄로 장사진이다. 나는 기꺼이 그 긴 줄에 합류한다. 고풍스러운 입구에 다가갈수록 빵 냄새가 진동한다. 향수로 만들어 내 꺼 하고픈 그 냄새는 초등학교 1학년 어느 봄날을 소환한다.

 

미장원 문을 일찍 닫은 엄마는 그 날 유난히 부산스러웠다. 코트 끝까지 단추를 채워주며 말했다. “엄마 손 절대로 놓으면 안 돼!” 비장미까지 느껴졌다. ‘쯧쯧혀를 차는 외할머니를 뒤로하고, 우린 장충동으로 향했다. 어린 내 눈에 마치 궁전처럼 보이는 빵집에 들어섰다. 황홀한 빵 냄새보다 나를 압도한 것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였다. 어리벙벙한 내 손에 빵 두 개가 들렸다. 엄마는 점점 걸음이 빨라졌고, 난 그녀 손에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 했다. 그렇게 끌려간(?) 곳은 장충체육관!

 

벌써 입구는 북새통이었다. 이리저리 치이고 나니, 빵 하나는 사라졌고 내 작은 손에 남은 빵 하나는 뭉그러져 있었다. 간신히 관중석에 자리를 잡은 순간, 안도의 숨을 내쉴 새도 없이 엄마는 돌변해버렸다. 더는 내 엄마가 아니었다.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사각 링을 향해,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포효하는 것이었다. 엄마만이 아니었다. 링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치고받고 메치는 팬티만 입은 두 남자의 움직임에 체육관 안의 모든 사람이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난 무서웠다. 엄마 등 뒤에 웅크려 눈물을 찔끔거리는데 손에 쥔 빵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뜯어 입에 넣었다. 이전의 두려움을 단번에 사라지게 하는 맛이었다. 빵이 내 입속에서 녹아들수록 사람들의 환호성은 귀에서 멀어졌고, 달콤함에 푹 빠진 나는 불편한 관중석에서 아기처럼 잠이 들었다. 폭신한 빵과 그 안의 달달한 노란 슈크림이 내게 마술을 부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엄마의 흥분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노키, 그 놈이 먼저 반칙을 한 거야. 김일이 조금만 일찍 박치기 공격을 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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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생긴 체육관에서, 딱 저런 모습의 레슬러들이 싸우고! 

                                                                                   (사진 출처_(좌)한국일보, (우)문화체육관광부)


 

멋쟁이였던 엄마의 취미는 프로레슬링, 권투 경기 관전이었다. 다른 스포츠 경기는 마다하면서 격투기 같은 종목이 TV에 나오면 엄마는 지금도 브라운관에 바짝 다가앉는다. 그녀의 뒤통수가 내 마음 한구석을 아프게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도 하기 전에 가장이 돼버린 엄마. 이른 나이에 결혼을 선택해야만 했던 소녀 가장. 그 삶의 무게를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곳, 작은 일탈을 맛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장충체육관이었다. 사각의 링으로 퍼붓던 포효는 아마도 엄마 자신을 향한 응원이었으리라. 그녀에게 숨 쉴 공간이 있었던 게 참 감사하다.

 

빵이 벌써 많이 팔렸네.” 쟁반을 들고 남편은 조급해한다. 분주한 뒷모습을 보면, 그의 고단함을 위로해 줄 어깨 한번 편히 내주지 않은 것 같아 미안해진다. 다음 경기는 내가 먼저 가자고 해보련다. 가방에 슈크림빵 두 개와 시원한 얼음물도 넣고. 스스로 하는 위로보다 가까운 이가 건네는 위로가 더 힘이 되고 잔뜩 성난 어깨를 가볍게 풀어 주리라 믿는다.

 

50+에세이작가단 정호정(jhongj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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