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소공녀>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60세 가까운 남성에게서였다.

만58세 아저씨 두 명이(소녀들이 보면 언뜻 할아버지로 보일 머리칼 희끗희끗한)꽉 채워도 관객 40명밖에 수용하지 못하는 소극장에 가서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여자이야기를 봤다고 말했다. 심지어 영화가 너무 좋았다고 했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앞뒤에 앉았던 여성관객들이 나란히 얌전히 앉은 그들을 슬쩍 돌아보더라고 극장 분위기까지 전했다.

나로선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라는 <소공녀>의 홍보문구가 왠지 불안하고 안쓰러워서 꾸물거리던 중이었다.

 

내이름은 미소.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짐을 이고 지고 한국여자 미소가 친구들의 집으로 떠난다

 

우울한데 우리 둘 다 좋아하는 일을 하러 가자! 집 보러 가자고!

얼마 전에 <레이디버드>를 보고 난 참이었다. <레이디버드>와 <소공녀>가 공연히 한 꿰미에 꿰지는 기분이었다.

가난하고 자의식 강하고 아직 자기 길을 못 찾고 떠돌아다니는 젊은 여자의 청춘의 한 때, 같은 주제로.

남이 지어준 이름을 극구 마다하고 스스로 자기 이름을 새로 지어 사용하는 ‘레이디버드’는 드넓은 미국에서 세크라멘토에 사는 것도, 철둑길 뒤 구석에 있는 누추한 집도, 신부와 수녀가 가르치는 고색창연한 학교도, 크리스틴이라는 이름까지 모두 부끄럽고 성에 차지 않아 몸살을 앓는 소녀다.

잔소리하고 사사건건 의견이 다른 엄마와는 당연히 불화하고 취직 못한 오빠부부와 실직한 아버지가 탐탁하지 않은 것은 불문가지. 자기 딴엔 유별나게 특출하고 남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과 취향을 가졌다고 여기겠지만 그저 고만고만한, 어쩌면 못돼먹은 사춘기소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유니크’에 목매는 ‘오디너리’의 발작 같은. 사랑만 받고 싶은 갈급한 몸짓 같은. 아무튼 자기를 중심으로 우주가 돌아가기를 원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불만 많은 레이디버드와 불행한 엄마가 의견이 척척 맞을 때가 있다.

우울감을 떨쳐버리고 싶을 때, 좁은 집을 벗어나고 싶을 때, 행복해지고 싶을 때 엄마와 함께 ‘좋아하는 일Favorite thing’을 하러 나간다. 둘은 금방이라도 새 집을 살 수 있는 것처럼 옷을 차려입고 좋은 집들을 구경하러 다닌다.

오오 소파는 이렇게 놓고, 창은 넓구나. 햇볕도 잘 들고. 철둑길 옆, 낡고 구린 동네를 떠나고 싶은 꿈을 잠시나마 반짝 이뤄보는 가난한 엄마와 딸의 짐짓 허세어린 여정을 짠한 심정으로 보았는데, 한국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를 보고서는 쩝, 할 말을 잃었다.

어떤 사람의 삶도 비교는 좋지 않다는 걸 누가 모르나. 더욱이 각자의 불행과 슬픔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은 더 나쁘다. 누가 더 불행한가, 누가 더 깊은 슬픔을 가졌는가를 저울질 할 필요는 없는 거, 맞다.

한국의 ‘미소’의 상황은 절대적으로 나쁜 데다 진짜 절망적이어서 손 댈 수도 없을 지경이라 미국의 레이디버드는 유복해보일 정도다. 미소에겐 싸우고 미워할 엄마도 없고 실직했어도 다정한 아빠도 없고 우울할 때 보러 다닐 좋은 집도 없다. 아니 있긴 하다. 미소는 서울에서 가장 허름하고 싸고 산만큼 높거나 낮은 땅 지하에 있는 방을 보러 간다. 보러 간 집들은 점점 나빠져서 막판에 만난 집은 아니 방은, 월세 십 만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부엌은 당연히! 없다. 그런데 미소, 이 한국여자, 불행이나 슬픔을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어느 영화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처음 보는, 진짜 ‘유니크’한 여자, <소공녀>의 미소다.

 

거리 데이트하는 미소와 한솔. 난 빚없이 살 거야. 집도 절도 없는 청춘의 두 연인

 

생각해보니 어릴 적 독서환경이 좋지 않아서 이 나이까지 <소공녀> <소공자> 같은 것을 읽지 못했다.

명작동화 같은 것을 읽을 초등학교 1학년에서 6학년까지의 어린이 필독서목록이 텅 비어 있다. 돌연 점프해서 언니오빠가 가져다 놓은 <문학사상>이니 <테스> 같은 것을 읽으며 자랐으므로 영화 <소공녀>를 볼 때까지 왜 제목이 소공녀인지, 동화책 주인공 소녀와 영화 주인공 여자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이 쓴 동화 완역본 <소공녀>는 영화를 다 본 후에 읽었는데 세상에, 이 나이에 읽어도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11세 주인공 소녀 사라 크루가 어찌나 도도하고 당차고 훌륭하게 살아가는지 50넘은 나보다 나았다.

 

당신은 친절하지도 않을뿐더러, 여긴 보금자리도 아니죠.

이상하게도 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영화에 대한 정보도 없고 동화책을 읽은 것도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주워들은 것들과 포스터 이미지만으로도 집 없는 소녀의, 떠도는 여자의 무거운 짐을 진 어깨 때문에 미리 좀 슬퍼져 있었던 까닭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겹겹이 여덟 겹이나 껴입은 옷들을 하나하나 벗으면서 사랑을 하려던 남자친구 한솔과 ‘미소’가 너무 추워 떨면서 ‘봄에 하자’고 할 때부터 눈물이 찔끔 솟았다. 인생 최고의 약점 ‘내 집, 내 공간 없는 사람’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제대로 건드려졌다. 나이 서른 즈음의 미소와 한솔은 둘 다 집이 없다. 한솔은 회사 기숙사에 살고 미소는 가파른 난간 끝 옥탑방, 남의 월세방에 다시 월세를 든 방에 바퀴벌레와 같이 산다. 그마저 세가 올랐다. 하루에 만원, 한 달 삼십 만원에서 십만 원 쯤 더 내야한다. 바퀴벌레마저 한기에 도망칠 살풍경한 집 아닌 창고 같은 방에서 책상 대신 여행용 가방을 눕혀놓고 사는 미소는 수입과 지출 목록을 짯짯이 살펴 생활의 우선순위를 수정해야 할 기로에 선다. 방세뿐인가. 모든 가격이 올랐다. 사람살이의 기본인 의식주에 우선순위를 매겨야 하는 미소, 그녀는 그중에서 주(住)를 포기한다. 집 같지도 않은 방을, 그래도 몸 눕힐 거처를 맨 끝으로 배치한다.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미소의 일회 당 수입 45,000원. 방세 삼십 만원, 하루 한 잔 위스키 값 12,000원, 담배 한 값 2,500원.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는 병을 막는 약값, 가끔 남자친구와 함께 하는 문화생활비는 헌혈로. 간식은 거리의 어묵꼬치. 제일 먼저 오른 것은 방값. 불균질하고 터무니없는 소비목록 중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고 이 여자는 무려 집을 포기하는 것. 바로 이어 위스키 값도 담배 값도 확 뛰어오른다.

 

담배값이 올랐어. 이제 2000원을 더 내야 해. 더 싼 걸로 줄까 묻는 편의점 주인. 모든 가격이 올라 황망한 미소

 

그제야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소공녀>인지, 그런데 왜 영어제목이 A Little Princess가 아니고 <Microhabitat>인지 한꺼번에 확 알게 되었다. 돈 많은 부자소녀에서 급전직하 거지신세가 되어버린 소설 속 사라 크루. 그래도 공주인 ‘척’ 품위를 지켜가다 마침내 진짜 공주가 된 그 소녀의 당당함에서 이야기 얼개를 가져왔구나 하는 앎. 영화주인공 이름 미소마저도 Smile로도 쓰일 수 있고 작고 작은 것이란 뜻의 微小로도 쓰였다는 것을. 그래서 제목이 미소란 여자의 서식지가 될 수도, 정말 작은 서식처를 의미한다는 것을.

소설 속 사라 크루는 아무튼 이제나 저제나 상황이 바뀌어도 도도하고 정확하다. 할 말 다 한다. 이봐. 민친 교장. 당신은 속물이고 친절하지 않아. 돈과 신분의 고하로 사람을 대하면서, 친절이나 다정함이라곤 없이 살면서 감사까지 바라선 안 되는 거예요, 일갈해 버린다.

 

"거기 서라! 고맙다는 인사도 안 할 참이냐?"

사라가 걸음을 멈췄을 때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던 야릇한 생각들이 급격히 소용돌이쳤다.

"무엇을 고마워해야 하나요?"

"친절을 베풀었으니 고마워해야지. 내가 너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았느냐?"

사라는 민친 교장에게 두어 발짝 다가섰다. 그 앙상한 가슴을 벌떡거리며, 어린아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맹렬하게 쏘아붙였다.

"선생님은 친절하지 않으세요. 절대로 친절하지 않으실 뿐더러 이건 보금자리도 아니죠."

이렇게 쏘아붙이고 돌아서서 미처 불러 세울 새도 없이 방을 나왔으므로, 민친 교장은 돌처럼 굳은 표정으로 사라의 뒷모습만 쏘아볼 뿐이었다.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소공녀> 중.

 

세크라멘토에 사는 가난한 소녀 레이디버드에겐 못사는 동네 누추한 집을 떠나고 싶어 몸살을 앓는다 해도 계란 프라이 하나 맘대로 못해먹게 구박하는 엄마라 해도 김이 솟아나는 부엌과 집이 있다. 동화 속 소공녀 사라 크루도 아버지가 죽고 돌연 가난한 천덕꾸러기가 되어 배곯고 춥다 해도 민친 스쿨 꼭대기 다락방과 옆방에 고아소녀 베키도 있다. 한국의 미소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상상력으로라도 꾸밀 처소가 없다. 찾아와주는 원숭이도 없다. 제일 외롭고 제일 가난하다. 밴드 하던 젊은 시절 친구들? 글쎄. 각자 자기 몫의 삶을 감당하고 살 뿐. 계란 한 판을 들고 친구 집에 들어가 밥상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심지어 위로까지 하는 것은 친구들이 아니라, 집 없는 미소다. 집 없는 사람은, 민달팽이보다 더한 보호할 껍데기가 없는 여린 존재다.

 

소설 속 소공녀. 다락방의 사라 크루와 베키

 

이쯤 되면 여기저기서 철없는 미소를, 비싼 술이나 마시고 백해무익 담배를 피우려고 집을 포기하고 떠돌아다니는 미소를 비난하고 가르치고 혀를 찰 말들이 쏟아질 것이다. 위스키 따위 끊고 방세를 내야지! 가사도우미 같은 하찮은 일 말고 더 번듯한 일자리를 구해야지. 담배 값이 올랐으면 그것부터 끊어야지. 게다가 여자가 아무 데나 들어가 재워달라고 하다니. 노력을 해야지, 노력. 열한 살짜리 고아소녀보다도 못한 거 아냐. 응응? 나라고 다를 바 없다. 미소 같은 아이가 딸이라면 불안하고 한심해서, 집 없이 떠돌 때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할까, 거품 물고 쓰러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전무후무한 한국여성 캐릭터 미소는, 그런데 그렇게 살기로 결정한다. 나는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집이 없어도 취향은 있어. 담담하게 길로 나선다.

 

한심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돼. 집이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소공녀>를 만든 영화감독 전고은은 여자다. 전고은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 말했다.

‘삼포세대’ 한국 젊은이의 절망과 꿈을 낱낱이 말하지 않겠다고. 철없는 미소의 성장영화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고.

나부터도 이 껑충한 여자 미소가 살림살이를 히말라야 등반하는 사람처럼 이고 지고 길을 나설 때, 친구의 집에 머물겠다고 계란 한 판을 사들고 찾아갈 때, 쌀이 떨어졌다고 쌀을 구해 오면서 뚫어진 비닐 봉투 구멍으로 그 귀한 쌀을 죄 흘리고 걸어갈 때, 한심했다. 쫌 조심해야지. 이 험한 세상에. 이 거친 세상에. 여자 혼자 집도 없이 어딜 떠돌아. 친구도 하루 이틀이지. 여행 중이라니 가당치도 않아. 요샌 어떤 여자도 그렇게 여행하지 않아. 부디 정신을 차려야하지 않겠어.

 

살림살이를 이고 진 미소. 손엔 계란 한 판. 친구가 반갑게 안아준다. 

 

더 젊은 날 같은 밴드였던 멤버들을 만나서 하룻밤 방을 빌려달라는 미소는 밴드에서 아마도 작사 작곡을 했던 모양이다. 노래를 짓고 만들어내는 사람, 가꾸고 돌보고 완성해 내는 사람. 가사도우미가 직업인 미소가 청소기를 돌리고 구석구석 닦아내고 보쉬 전동드릴로 먼지하나까지 잡아낼 때 집중하고 몰두한 그녀의 표정은 예술장인에 다름 아니다. 자기에겐 허락되지 않은 그 넓고 깨끗한 공간에서 미소는 부러움이나 시새움 없이 프로답게 일한다.

피 같은 돈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글렌피딕 위스키 한 잔을 마시고 거리를 바라보며 담배 하나를 맛나게 피운다. 친구 집이 여의치 않으면 24시간 카페에서 엎드려 자고 공중화장실에서 머리를 감는다. 약은 드문드문 먹는 걸까, 머리카락이 하얗게 검은 부위를 먹어 들어가는데도.

 

미소와 친구들의 젊은 한 때. 그 때 그 시절 미소와 친구는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미소에게 집이 없다는 외엔 다를 바 없다

 

위스키 한 잔 담배 한 갑 그리고 다정한 남자친구 한솔만 있으면 된다는 미소의 충만한 시간.

남보기엔 한심해도 미소는 가만히 생각과 취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가족과 관계와 집 속으로 모두 돌아간 시간, 강가에 불 밝힌 텐트 하나

레이디버드는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세크라멘토를 탈출해 뉴욕에 도착한다. 꿈으로 가는 첫길에 들어선다. 청춘? 꿈? 성공? 제법 똑똑하고 반항적이던 레이디버드는 순식간에 여러 가지를 깨닫는다. 혼자 운전하면서 봤던 세크라멘토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철자가 틀릴까 두려워 수십 번 편지를 고쳐 쓴 엄마의 편지를 읽자마자 엄마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된다. 밤새 술 마시고 기절한 후에 찾아간 곳은 뉴욕의 성당. 지루하다며 욕했던 고향 학교 성당에 울려 퍼지던 성가가 얼마나 은혜로웠는지도 단번에 감동한다. 아하. 거리가 멀어지고 헤어짐으로써 바로 절절히 깨닫게 되는 가족의 사랑과 고향의 아름다움이라니. 그녀는 심지어 단박에 내내 고집하던 ‘레이디버드’라는 이름까지 던져버린다. 내 이름은 크리스틴, 레이디버드가 아니에요. 크리스틴은 예쁜 이름이에요, 눈물을 줄줄 흘린다. 화해는 빠르고 회복은 쉽다. 사라 크루는 상상 속의 공주만큼 돈 많고 품위 있는 진짜 공주가 된다. 조물주가 원래 베푸는 자로 만든, 위엄 있는 공주로 마음껏 행복해지고 훌륭해진다.

미소는, 미소로 남는다. 한 번도 이름을 바꾸지 않고 상상력으로 다른 존재인 ‘척’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지도 않고 원래부터 가난했으나 더 가난해진 미소로. 시종여일 미소로만 아주 미소하게 남는다.

 

소설 속 사라 크루 소공녀보다 더 가난한 미소가 집 없이 선 거리. 멀리 미소 앞에 맨발의 조각품이 차가워보인다

 

예전으로 예전에 가졌던 것들의 소중함 속으로 레이디버드가 걸어간다면 미소는 그나마 가졌던 것들로부터 멀어지고 떨어지고 지워간다. 투덜대고 싸우고 갖고 싶은 것을 향해 돌진하면서 착착 순응하는 여자가 있고 거의 불평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배우지도 않고 갖고자 욕망하지도 않는 여자가 있다. 미소는 끝까지 울지 않는다. 미소 대신 내가 울었다. 친구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은 미소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검은 정장의 친구들 대화를 들으면서. 하얘진 머리칼을 날리면서 히말라야 포터처럼 온 몸에 짐을 진 미소가 바람처럼 거리를 지나갈 때.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 취향을 포기하지 않는, 서울의 어느 숲 가, 다리 밑, 조그만 텐트에 불이 켜질 때, 응원하는 마음으로 울었다. 부디 안전하기를. 아무리 빚 없이 사는 게 삶의 철학이라 해도, 그래도 사우디아라비아에 돈 벌러 간 한솔이 빨리 돌아와 바람 끝 여린 불빛의 텐트에서 미소의 손을 잡기를. 그래서 마이크로해비타트, 작고 작은 서식처라도 들어가 잠들 수 있기를. 봄이 오기 전 겨울에도 사랑할 수 있기를.

 

P.S 사실은 서울 집값 좀 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방세 좀 내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분노가 컸다. 사람이 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