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황금의 나라였다. 왕과 귀족은 황금으로 권위와 부를 과시했다. 대저택에 금을 입히는 금입택(金入宅)도 유행했다. 사후에도 화려한 삶을 꿈 꾼 왕과 귀족은 왕릉과 무덤에도 세련된 황금 공예품을 부장하도록 했다. 신라인의 황금 사랑 문화는 이웃 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일본서기에서는 신라를 ‘눈부신 금은채색이 많은 황금의 나라’로 묘사했다. 이란 압바스 왕조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도 ‘왕국과 도로 총람’에서 ‘금이 많이 나고 기후와 환경이 좋은 나라로 무슬림이 들어가면 나오지 않는’고 설명했다. 이 같은 황금 문화는 지금까지 금빛 찬란한 유물 발굴로 이어지고 있다.

 

보물선 등 매장물을 발굴하면 소유권이 궁금해진다. 전통시대에 보물선을 발견하면 누구의 것이 될까. 조선 인조 때 신라의 황금이 발굴돼 화제가 되었다. 1천 년 동안 잠자다 빛을 본 황금의 소유권과 발굴자에게 위계로 매수한 사람, 국제 관계 등이 얽힌 당대 시대상을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동궁과 월지 <출처 : 경주시>

 

인조 때는 국력이 극히 약했다. 나라 살림도 파탄에 이를 지경이었다. 병자호란 패배 후에는 청나라에 해 마다 막대한 공물도 보내야 했다. 공물 목록에는 황금 1백냥(兩), 백금 1천냥, 물소뿔 2백대, 담비가죽 1백장, 녹피 1백장, 다(茶) 1천포, 수달피 4백장, 청서피 3백장, 호초(胡椒) 10두, 세포(細布) 1만필, 쌀 1만포(包) 등이 포함돼 있었다.

 

거의 모든 물자가 바닥난 나라에서 공물 확보는 큰일이었다. 특히 황금 구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이 때 한 백성이 노다지를 캤다. 무려 20근, 즉 12킬로그램을 발굴했다. 황금 320냥으로 청나라에 3년간 보낼 수 있는 양이었다.

 


골드바 <출처: 픽사베이>

 

인조 19년인 1641년이다. 경상도 함양 사람 원연은 옛 절터의 토굴에서 살고 있었다. 원연과 아내는 각자 꿈에서 두세 차례 신인(神人)을 보았다. 신인은 “너희들을 잘 살게 해 주겠다”고 했다. 부부가 하루는 땅을 팠다. 오래 된 항아리가 기와로 덮여 있는데 ‘일천 년(一千年)’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항아리 안에는 수십 개의 황적색 물건이 있었다. 그 중 한 개에는 ‘의춘대길(宜春大吉)’ 글자가 보였다. 원연은 황금을 알지 못했다. 함양에 사는 이웃 사람이 주석으로 속여 헐값에 샀다.

 

그는 진실이 알려질 것을 걱정해 호남으로 이사했다. 의심한 전주부윤이 그를 체포하려고 했다. 숨을 곳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정공법을 선택했다. 황금 십여 냥을 호조에 바치며 말했다.

 

“나라에서 청에 보낼 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이에 금을 바칩니다.” 호조에서는 갸륵한 정성을 보인 백성에 대한 포상을 논의했다. 그런데 전주와 함안의 수령에게서 그가 사기꾼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상황은 급반전 됐다. 그는 의금부에 투옥됐고, 기화(奇貨)를 탈취하고, 죄 모면용으로 약간의 금을 나라에 바친 게 드러났다. 나라에서는 그의 집을 수색해 금 130냥을 찾아냈다. 그러나 다른 곳에 더 숨겼을 것으로 보고, 계속 구금했다.

 


눈 덮인 불국사 <출처 : 경주시>

 

그러나 우승지 김육은 구속이 잘못됐음을 인조에게 간언한다. “천 년 동안 잠잔 보물이 발굴돼 나라에 극히 긴요하게 쓰이게 됐습니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김육의 석방 주장 논리는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바닥난 나라 재정에 도움이 된다. 나라에 도움이 된 것은 공로이고, 교묘한 속임수는 흠이다. 만약 흠 때문에 상을 못준다면 형벌만이라도 면해야 된다.

 

둘째, 상거래에서 많은 이익을 많이 얻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가 원연을 속이고, 책임을 면하려고 호조에 금을 바친 것은 도덕적인 비난 대상이지 법적 처벌 대상이 아니다.

 

셋째, 사적인 거래는 보호되어야 한다. 그는 국유재산을 훔치지 않았다. 개인 사이의 매매는  나라에서 관여할 사안이 아니다. 이미 조정에서 가격을 쳐 보상을 했다. 이 상태에서 처벌을 하면 왕정(王政)에 흠집이 난다.

 

이에 대해 인조는 고민 끝에 판결을 내렸다. 첫째, 그가 죄를 모면하려고 나라를 속였다는 점은 의금부의 주장이다. 둘째, 스스로 금을 바쳤으니 공로가 있다는 것도 그와 일부의 주장이다. 셋째, 이는 조사가 완벽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다만 누구의 주장을 인용하더라도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임금의 뜻에는 어긋난다. 바른 정치를 위해 그를 즉시 석방한다.

 


인조와 인열왕후를 모신 파주 장릉 전경 <출처 : 문화재청>

 

그렇다면 대한민국 법에 따르면 황금의 권리는 누구에게 있을까. 관련법규는 민법 제254조, 민법 제16조, 민법 제255조를 생각할 수 있다. 제254조 매장물 소유권 취득에 의하면 매장물 발견 공고 1년 내에 소유자가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면 발견자가 소유권을 취득한다. 다만 타인의 토지 등에서 발견한 경우는 소유권이 각각 절반씩 있다.

 

또 민법 제16조 국유매장물의 보상 규정에 의하면 매장물 소유자가 국가인 경우에는 매장물이 토지 기타의 물건에 매장되어 있던 때에는 추정가액의 100분의 60이 발굴자의 몫이다. 또한 민법 제255조 문화재의 국유 조항에 의하면 발굴된 문화재는 국유가 된다.

 

이 조항 등을 종합하면 몇 가지 쟁점이 가능하다. 먼저, 황금의 소유자가 나타나지 않은 경우다. 이때는 엣 절터의 소유권을 따져야 한다. 절에서 토지를 소유한 상태라면 절과 발굴자 원연이, 토지가 국유지라면 나라와 원연에게 각각 절반씩의 권리가 있다.


다음, 황금의 소유자를 나라로 볼 경우다. 이때는 발굴자인 원연에게는 100분의 60에 해당하는 소유권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황금이 문화재 가치가 높을 때다. 황금이 문화재일 경우에는 나라의 것이 된다. 원연에게는 포상만이 주어진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발굴자의 황금 소유권을 당연하게 여겼다. 황금을 원연 부부의 것으로 여겼다. 황금 발굴자인 원연 부부의 소유권을 전제한 가운데 위계로 매수한 사람과의 거래 정당성과 그 이후 행적을 문제 삼았다. 이는 만약 조선시대에 바다 밑에서 보물선을 찾았다면 소유권이 발굴자에게 귀속됨을 의미한다. 

 

파주 장릉 <출처 : 문화재청>

 

우여곡절을 품은 황금은 청나라에 보내졌다. 조선은 이완을 사신으로 보내 신라시대 옛 사찰인 신계서원 터에서 황금 20근(斤)이 발굴된 경위도 알렸다. 이에 청나라는 “신라의 상서로운 황금은 조선 왕의 소유다. 정성만 받고 싶다”며 황금을 조선에 돌려보냈다.

 

황금은 반짝인다. 빛나는 보물이다. 눈물도 반짝인다. 황금을 잘 활용하면 삶도 반짝인다. 그러나 과정과 목적이 순리에 맞지 않으면 자칫 눈물로 반짝일 수 있는 게 황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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