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이 있는 도보여행 “다시 세운 세운”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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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의 과거와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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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기억 속에 1970, 80년대 세운상가란 아마도 전자 부품들이 몇 차례의 납땜을 거쳐 라디오, 레코드와 타자기를 구매했던 곳으로 기억된다. 
그때 당시에 사람들은 종종 “탱크 빼고는 다 만든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통했으며, 한때 그곳엔 말 그대로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세운상가 부지는 일제강점기 연합군의 폭격에 대비해서 1945년 3월, 일제는 종로에서 필동까지

폭 50m, 길이 860m 직사각형 모양의 땅을 ‘전시 소개공지대’(전쟁 중 발생한 화재가 주변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비워 놓는 공간)로 고시했다.

 

한국전쟁 이후 공터는 주인 없는 땅은 이후 6ㆍ25전쟁을 거치면서 빈민과 피난민의 판자촌으로 전락했다. 
1966년 당시 제14대 김현옥 서울시장이 대대적인 서울시 정비를 추진하면서

윤락업소가 즐비하던 종로 판자촌 일대를 재개발하여 도시의 상징으로 만들고자 하여

세운상가의 청사진을 2년 후에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단지 형태로 종합 전자 상가인 세운상가가 들어섰다. 

 

 

 

그해 9월 착공, 이듬해인 1967년 현대아파트 상가와 아세아상가가 잇달아 들어섰다.
그리고 1968년 마침내 대림 청계 삼풍 풍전 신성 진양 등 8~17층짜리 건물 8개로 이뤄진 세운상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1층에서 4층은 상가, 5층 이상은 주거 공간이었고 지하에는 주차장, 지상에는 무려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 
김 전 시장은 여기에 ‘세상의 기운이 다 모인다’라는 뜻을 담아 ‘세운’이라고 이름 붙였다.

 


세운상가는 이름처럼 승승장구해 1970년대 중반까지 도시의 상징이었고 신축 때부터 유일의 종합 가전제품 상가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연예인· 고위공직자 ·대학교수 등이 앞다퉈 주거시설에 입주했으며

월남전에 파병됐던 군인들이 들여온 녹음기나 카세트, 카메라 등 전자제품이 활발하게 거래됐다. 

이전에는 없던 물건들을 수리하기 위해 부품이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했다. 
최신 문물이 거래되면서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까지 찾아온 손님들로 상가는 항시 북적댔다. 

 

세운상가는 한국의 산업화 중심지로 기계·부품은 물론 전기, 귀금속, 출판업의 중심이었다
세운상가의 전성기 70~80년대 영화를 좋아하던 나는 종로에 있는 단성사와 피카디리 극장을 거쳐

세운상가 근처에 위치한 극도극장, 대한극장, 명보 극장을 자주 방문할 때마다 세운상가를 거쳐 갈 때가 많았다.  
그곳은 다른 사람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세운상가의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으며,

물건을 사기 위해서 번호표를 받고 줄을 서야 하는 정도였다. 


세운상가 건물 외부도 북적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손님과 행인, 용달차와 버스 ·택시가 함께 뒤범벅되어 도로와 인도는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세운상가 주변의 청계천과 을지로 등지는 동대문과 남대문 그리고 종로의 상권을 잇는 주요 길목이었다.
1980년대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 확산에 따라 상가는 더욱 번성, 3,000여 개 업체와 2만여 명의 고용인구가 살아 숨을 쉬는 종합 전자 상가로 세를 넓혔다.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대부분이 이곳에서 거래됐고, 상가 주변에는 전기· 전자 부품점과 조명용품점들이 자리 잡았다. 

 


1985년부터는 컴퓨터 판매점을 특히 애플 등 외국산 컴퓨터를 취급하는 곳은 세운상가가 전국에서 유일했다.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그곳을 자주 방문하였다. 
코맥스와 TG삼보컴퓨터, 한글과컴퓨터 등 굵직굵직한 정보통신 기업이 이곳을 기반으로 성장했었다. 


1987년 들어 정부는 용산역 서부에 청과물 시장을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세운상가 상점들을 이전시키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그해 7월 1일 ‘용산전자상가’가 태어났다. 
새롭게 떠오른 용산으로 상인들이 대거 이동하면서 세운상가는 빠르게 지기 시작했다.
가게는 줄줄이 비고 찾는 사람들은 가파르게 줄어 1990년대 초반에는 부품을 구하려는 전자공학도와 몇몇 단골들만이 왕왕 오갈 뿐이었다. 


상점들이 용산으로 대거 빠진 뒤에도 상가 상황이 몹시 나쁘지는 않았다 한다. 
2000년대 이후 인터넷 거래가 확산하면서 시대를 풍미했던 세운상가 전자 상가는 제 기능을 내줬다.

2006년 철거가 계획됐지만, 보상과 경기 악화의 문제와 서울 시내 사대문 안을 파다 보면 역사적 유물과 집터들이 나오곤 한다. 
세운상가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2014년 철거 계획은 폐기됐고 대신 도시재생으로 세운상가의 건물은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있으며

세운상가 땅 밑의 조선 시대 유물의 발견과 토층 또한 그대로 보존하였다. 

 


우리가 종묘에서 방문한 세운상가 앞에는 ‘다시 세운 광장’을 만들어 시민들의 접근성을 높였고

건물 외벽에는 ‘세운상가와 제작 생산 판매 주거 상업 문화가 제작, 생산, 판매, 주거· 상업문화 동시에 이뤄지는 장소라는 의미의

'Makercity Sewoon’ 이라는 대형 간판이 걸려있었고,

건물 3층의 동서쪽에는 청계천 위로 세운상가와 청계 상가를 잇는 ‘다시 세운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공중 보행로 “다시 세운교” 위에는 젊은 사업가들이 입주한 ‘세운 메이커스 큐브’가 오래된 세운상가 반대편에 들어섰다. 
“세운 메이커스 큐브”에는 세운상가의 역사를 담은” 세운 전자박물관”과 기술 서적을 읽을 수 있는 세운 테크라운지도 운영되고 있었다.

 

참고 : 서울시에서 발행한 http://ebook.seoul.go.kr/Viewer/1D67AB8A9YJ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