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가을, 남한강 일대로 몇 차례 폐사지(廢寺址) 기행을 떠났다가 여주에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능인 영릉(英陵)과 효종과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영릉(寧陵)까지 둘러보았다. 울긋불긋 단풍이 찬란하고 비까지 내려 고즈넉한 분위기가 이를 데 없이 좋았지만 왕릉에 대해서 일자무식이었던 탓에 능은 보았으되 능의 형식과 의미는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풍경에 취해 “우와, 좋~다, 정말 멋지다”는 감탄사만 되풀이했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영릉(英陵), 비 내리는 날의 정취가 가득하다.

 

나는 지금껏 궁궐에도 자주 가고, 종묘대제나 궁중음악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왕릉을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던 얼마 전, 조선의 궁궐에 관심이 많아 궁궐의 나무까지도 공부하는 지인이 9월 마지막 수요일에 열리는 동구릉 능침(陵寢) 개방 행사를 알렸다. 답사를 가기 전에 공부를 해야 한다며 몇 가지 자료를 보내주었다. 지난 가을의 씁쓸한 기억을 떠올리며 열심히 자료를 읽었다. 덕분에 조선 왕릉에 대해 기본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봄, 가을 소풍가던 조선의 왕릉

 

조선시대의 왕릉은 모두 42기이다. 개성에 있는 2기, 태조의 첫 부인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과 정종의 후릉(厚陵)을 제외한 나머지 40기가 남한에 있다. 조선의 왕은 순종까지 27대지만 후대에 왕으로 모셔진 추존 왕과 왕비들의 무덤을 포함해 모두 42기다. 그중 남한에 있는 40기가 200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북한에 있는 2기와 연산군, 광해군의 묘를 함께 지정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조선의 왕릉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부터 마지막 황제 순종의 유릉(裕陵)까지 500여 년 넘는 세월 동안 능 조성에 관한 이념과 원칙을 지켜온 덕분에 형식면에서 일관성을 보여준다. 조선의 왕릉은 여주의 두 영릉, 화성의 융·건릉, 영월의 장릉을 제외하면 대부분 서울 근교에 자리 잡고 있다. 구리의 동구릉, 남양주의 홍·유릉, 고양의 서삼릉, 서오릉 등은 도성에서 10리(4km) 밖, 100리(40km) 안에 능을 조성하라는 규정에 따라 서울에 인접해 있다.

 

능과 더불어 조성되고 보존된 드넓은 숲은 왕릉이 죽은 자의 공간만이 아닌 산 자들도 즐기는 곳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양지바르고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능과 숲은 학창시절 단골로 소풍가던 명소였다. 6,70년대 서울과 근교에서 초중고를 다닌 사람이라면 능 주위에 있던 석마를 타거나 넓은 비탈에서 미끄럼을 타던 소풍날의 추억, 한 자락쯤 가지고 있을 터이다.

 

   융·건릉에 조성된 참나무 숲,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시원스럽게 뻗어 있다.

 
   능침 공간 앞의 언덕, 아이들이 미끄럼을 타기 딱 좋은 언덕이다.
 

왕의 장례, 국장(國葬)

 

조선은 기록의 나라답게 왕이 태어나서 혼례하고, 죽고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과정들을 꼼꼼하게 기록해놓았다. 각 왕들의 실록, 승정원일기, 왕실에서 벌어지는 행사를 기록한 의궤들이 그것이다. 왕의 장례와 관련해서도 모든 절차와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의궤를 편찬하였다. 그 정교한 기록들 덕분에 매년 10월 정조의 화성행차도 재현이 가능했다. ‘조선왕조의궤’가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절대 권력자 왕이 세상을 떠나면 치르는 장례인 국상(國喪)은 국가 행사의 의식과 절차를 규정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라 거행했다. 국상은 기간도 3년이나 걸리고 절차 또한 60단계가 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사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왕이 승하한 직후 내시가 궁궐 지붕에 올라가 '상위복'이라 외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조선시대 국장(國葬)의 세 번째 단계인 복(復)이다. 내시가 북쪽을 향해 세 번 부르는 의식이 끝나면 본격적인 장례 절차에 들어간다.

 

조선은 왕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빈전도감(殯殿都監), 국장도감(國葬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이라는 임시 관청을 두었다. 왕의 승하로부터 재궁(梓宮 : 왕의 관)을 능에 안장할 때까지 대략 5개월이 걸린다. 그동안 세 도감은 각기 맡은 바 소임을 하며 왕의 장례를 준비했다.

 

빈전도감은 국상을 치를 때까지, 빈전(빈소의 높임말)에 모신 왕의 옥체를 관리·보존하는 일을 맡았다. 또한 왕의 수의를 비롯해 왕실 및 문무관료의 상복을 준비했다. 승하한 왕에게는 소렴 때 19벌, 대렴 때 90벌 등 100여 벌의 수의를 입혔다 하니 천상지존인 왕의 권위에 걸맞은 의복을 갖추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지금처럼 영안실이 없던 시절에 5개월 동안 왕의 시신을 어떻게 보존했을까?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한강 근처에 위치한 동·서빙고에 얼음을 보관하다가 여름이면 왕이 신하들에게 얼음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국상 기간에도 설빙(設冰)이라는 절차에 따라 얼음으로 재궁 주위를 채워 온도를 낮게 유지했다. 얼음이 녹아 생긴 물을 흡수하도록 많은 양의 미역이 쓰였다.

 

국장도감은 왕의 장례에 쓰이는 모든 물품과 문서들을 담당했다. 재궁을 운구할 가마와 만장, 제기 등을 제작했다. 산릉도감은 풍수지리에 따라 정해진 왕릉 후보지에 왕릉을 조성하는 일을 수행했다. 왕이 살아생전에 머문 공간이 궁궐이었다면 사후에 머물 궁궐이 바로 능이다. 따라서 왕릉 또한 엄격한 격식과 절차에 따라 조성한 것이다.

 

   이미지 출처 : 조선왕릉 누리집 http://royaltombs.cha.go.kr/cha/idx/SubIndex.do?mn=RT
 

정조 국장 당시 편찬한 『정조국장도감의궤 (正祖國葬都監儀軌)』에 실린 대여 평면도의 일부(사진 조선왕릉 누리집), 이렇듯 조선은 왕의 장례를 엄격한 절차와 형식을 갖춰 치렀다.

 

왕실의 무덤 종류와 능의 형식

 

조선 왕실의 무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무덤인 능(陵),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을 낳은 후궁인 사친의 무덤인 원(園), 그 외에 왕실 가족의 무덤은 묘(墓)라 불렀다. 원으로 대표적인 곳이 우리에게 효창공원으로 널리 알려진 효창원(孝昌園)이다. 효창원은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 등 왕실의 무덤이 있었다. 하지만 서울 도심에 자리한 울창한 숲에 눈독을 들인 일제(日帝)가 1924년 효창원을 서삼릉으로 옮기고 그곳 일부를 공원으로 바꾸었다.

 

해방 후, 김구 선생이 한인애국단 단원으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백정기(白貞基) 등 애국지사의 묘를 효창공원에 이장했다. 1949년 김구 선생 자신도 그곳에 묻힘으로써 효창공원은 주요 독립지사의 묘역이 되었다. 일제에 의해 쫓겨난 조선 왕실을 대신하여 독립투사들을 효창원에 안치한 김구 선생의 마음이 느껴져 숙연해진다.

 

남녀와 부부의 구별이 확실했던 조선에서는 왕과 왕비가 함께 묻혔을까? 왕과 왕비를 합장한 경우도 있고 따로 묻은 예도 있다. 그래서 능은 봉분의 형태상 여러 형식이 존재한다.

 

단릉(單陵)은 봉분이 하나만 조성된 형태이다. 숙부에게 권력을 빼앗긴 비운의 왕, 단종의 장릉(莊陵)과 평생 지아비를 그리워한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릉(思陵)이 대표적이다. 합장릉(合葬陵)은 하나의 봉분에 두 개의 관을 묻은 경우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영릉이 합장릉이다.

 

쌍릉(雙陵)은 하나의 언덕에 두 개의 봉분을 두었다.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헌릉(獻陵)이 쌍릉이다.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은 하나의 권역에 정자각을 하나 두고 각기 다른 언덕에 봉분을 조성한 경우다. 예종(睿宗)과 안순왕후(安順王后)의 창릉(昌陵)이 이에 속한다.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하나의 언덕에 위, 아래로 봉분을 배치했다. 효종(孝宗)과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무덤이 동원상하릉이다. 마지막으로 삼연릉(三連陵)이다. 왕과 왕후들의 봉분 세 개가 나란히 있다. 헌종(憲宗)과 효현왕후(孝顯王后), 효정왕후(孝定王后)의 무덤이 삼연릉이다.

 

 

   조선 왕릉의 다양한 형태들(이미지 출처 : 조선왕릉 누리집 http://royaltombs.cha.go.kr/cha/idx/SubIndex.do?mn=RT)

 

왕릉에 대한 자료를 읽다가 문득, 자식을 낳지 못한 왕비들은 왕이 승하하고 나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궁금했다. 특히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1440~1521)는 어떻게 살아갔을까? 사릉에 갔을 때, 연세 지긋하신 해설사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다. 단종이 1457년에 죽임을 당한 후 정순왕후는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아들 정미수(鄭眉壽)를 시양자로 삼았다. 82세로 세상을 떠난 그녀는 해주 정씨의 묘역에 묻혔다가 사후 약 170년이 지난 1698년 숙종 24년에 복위되었다.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일곱에 죽은 단종과 지아비를 잃고 64년 세월을 홀로 살아간 정순왕후가 왕과 왕비로서 누린 부귀와 영화는 짧았지만 고통의 세월은 길었다. 요즘 나이로 치면 고등학생쯤 되었을 단종과 정순왕후의 비극적인 삶을 생각하니 애잔한 마음이 든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묻힌 사릉(思陵), 홍살문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으로 보인다. 정자각 뒤편에 능침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빨리 흐르는 것은 특별히 기억할 만한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처럼 평화로울 내 삶이 어쩌면 조선시대 왕들의 삶보다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