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일이 없어졌다. 아주 가까워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만남을 집 밖에서 가지고 있다. 예전 같으면 밖에서 식사를 마치고 집에서 차 한 잔을 나눌 법한 데도 근처 카페에서 만남을 마치는 경우가 많다. 가족 외에 드나드는 사람이 없다 보니 더욱 집으로 사람을 들이기가 망설여진다. 사람 사는 집이 깨끗할 때도 있고 지저분할 때도 있는데, 자주 드나들면 평균치의 내 집을 보여줄 수 있지만 어쩌다 초대하는 경우, 최고의 집 상태를 보여줘야 할 것 같은 부담감 때문이다.

 

 

어렸을 때도 아니고 다 커서도 나에게는 세 가지 소원이 있었다. 마법처럼 이루어지는 소원이라기보다 하고픈 일, 경험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그중 하나가 무엇인가 하니 좋은 글을 써서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내는 것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을 쓰는 것이고 책을 낸다는 것은 그 작품이 탁월하다는 방증인 시대의 소원이었다.

그렇게 소망하던 글의 종류와는 무관하게 젊었을 적에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가졌었다. 대학 재학 중에 우연히 라디오 방송의 원고를 쓰게 되어 십여 년 넘게 매일 원고지와 워드 프로세서 앞을 떠나지 못하는 세월을 살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쓰고 디제이의 입을 거쳐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는 일은 가끔 행복했다, 가끔. 그리고 자주 시간에 쫓기니 글의 완성도에 대한 고민을 회피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원고를 넘기는 순간 다음 원고를 구상해야 하는 일이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그래도 오프닝과 클로징, 음악 사이의 브리지 여러 꼭지로 조용히 원고지 칸만 채우면 작가 소리를 듣던, 시절 좋았던 때였다.

 

 

방송 환경이 급변하며 작가의 역할도 진화를 거듭해야 할 때, 변화에 적응하기보다 전직을 꿈꾸며 일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아이 둘을 키우며 새 일을 모색하기란 힘들었고 무엇보다 집에서 아이 키우며 살림하는 일이 즐거웠다. 그렇게 시간을 속절없이 보내고 이즈음이 되니, 문득 지난 시간을, 지금 시간을 글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럴 즈음 50+ 당사자 필진 공모가 있었고 지원서에 이런 내 마음을 피력했다. 나에게 글쓰기는 가장 쉽고도 어려운 작업인데 다시 용기를 내어보고 싶다고.

 

그런데 글이 써지질 않는다. 글을 써내기로 약속을 했는데 뭘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한 시간이 계속된다.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뻔하다. 잘 쓰고 싶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는 싶은데 글감도 좋고, 글 솜씨도 좋고, 구성도 좋고… 뭐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을 찾다 보니 그저 헤매고만 다닌다.

물론 이런 나 자신이 어이없기는 하다. 오래도록 글쓰기를 멈추었던 사람이 그것도 전에 술술 써 내려갔던 필력의 소유자도 아니면서 손이 풀릴 시간도 없이 뭔가를 짠! 하고 써낼 것을 기대하다니!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글을 쓰는지 자꾸 기웃거리게 되었다.

역시나 특별한 비책은 없었다. 많은 사람이 얘기한다. 어떤 글이든 자주 써야 한다고. 사실 나는 나를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개인적인 SNS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쩌다 한 번 공을 치면서 홈런이나 안타가 아니면 어쩌나 걱정되어 마운드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타자와 같다. 헛방망이질도 하고 삼진 아웃당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자주 쓰지 않다 보니 한 번에 승부를 보려고 한다. 날아오는 공을 향해 무수하게 방망이를 휘둘러도 어쩌다 홈런, 어쩌다 안타를 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글 또한 마찬가지다. 글쓰기와 집에 손님을 초대하지 못하는 것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주 써야 좋은 글이 나온다. 마음에 드는 글,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의 평균치 글이 나온다. 작가 유시민은 그의 책 『글쓰기 특강』에도 그것을 글쓰기의 철칙으로 놓고 있다. “쓰지 않으면 잘 쓸 수 없다. 많이 쓸수록 더 잘 쓰게 된다.”

본인이 보기에 시답잖은 글이라 하더라도 자꾸 쓰고 고치다 보면 좋아진다. 이런 야구의 룰도 알고, 인생 또한 그러하다고 알면서도 제 삶에 적용하지 못하며 끙끙 앓았다.

 

“저는 블로그를 하면서 매일 마감하는 훈련을 합니다. 돈 받고 하는 일도 아닌데 왜 마감에 쫓기느냐고요? 품질을 높이기 위해 글을 아끼면 오히려 품질은 더 떨어집니다. 마감에 쫓기며 꾸준히 써야 글이 느는데, 마감이 없으면 긴장도 사라지고 열심히 써야겠다는 의욕도 사라져요. 취미 삼아 하는 블로그지만 마감의 틀 안에서 자신을 괴롭히기를 감히 권합니다.”

김민식 『매일 아침 써봤니?』 위즈덤하우스, 142쪽

 

그리고 또 다른 책에서도 기대고 싶은 문장을 발견했다.

글쓰기 관련 책으로 유명한 작가 ‘나탈리 골드버그’가 글쓰기 강좌에서 자신이 쓴 문장이 편집자 손에 의해 잔뜩 수정된 흔적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자, 그들이 너무 좋아하고 의기양양해 하더란다.

 

“선생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엉망이었네요.” 학생 중 하나가 입을 귀에 걸고 말을 뱉었다.

(...) 책을 읽고 교향곡을 듣고,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모두 완성 작품을 보는 것이다. 작품은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처럼 보인다.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아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마치 아테나 여신이 제우스의 머리에서 나온 것과 같다.

언젠가 모건 도서관에서 베토벤, 모차르트, 브람스, 리스트, 차이콥스키의 미완성 악보들을 본 적이 있다. 충격이었다. 줄로 긋고 수정한 자국투성이였다. 이 천재 작곡가들도 나와 같은 인간이었단 말인가? 모차르트의 40번 교향곡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 일은 나에게 있어 대단한 경험이자 깨달음이었다.”

나탈리 골드버그 『버리는 글쓰기』 북뱅, 237~238쪽

 

베토벤의 악보

 

그럼 이 지점에서 궁금해질 것이다. 그런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면 그렇게 실천을 하면 될 것이지 이런 글을 쓰는 이유가.

이 글은 앞으로 실천하여 글을 써보겠다는 나의 의지 표명인 셈이다. 흡연자가 담배를 끊을 때 굳이 사방팔방에 알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약속을 실천할 강제 장치를 해두는 셈이다. 내가 글을 쓰든 말든, 어떤 글을 쓰든 상관은 없을 테지만 한 사람이 자기 앞의 산을 넘어가는 것을 지켜봐 주길 바랄 뿐이다. 응원해주면 감사할 일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