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정말 어른 맞아요?

아이가 도서관에 갔다가 돌아왔다. 귀가할 시간이 아닌데도 빨리 돌아온 데다 불쾌한 표정이 떠올라있어 물었다. 긴히 검색할 것이 있어 공용컴퓨터 앞에 줄을 섰다고 한다. 앞에 한 아저씨, 아니 어르신 한 분이 오래 컴퓨터 앞에 서서 일을 보고 있더란다. 아이는 그저 그 사람의 컴퓨터 화면을 보지 않는 것이 예의일 듯해서 줄은 서되, 거리를 유지하며 서 있었는데 그 어르신이 자꾸 뒤를 돌아보며 아이의 위아래를 훑어보기도 하고 화면을 극구 가리기도 했단다. 짧은 반바지 차림이었던 아이는 왜 저러시나 싶었으나 기다릴 수밖에. 사실 아이는 도서관에 갔다 올 때마다 거기서 만난 남자 어르신들의 행태에 불쾌했던 일들을 얘기한 적이 많다. 도서관 이름은 청소년도서관이지만 남녀노소 누구나 사용할 수 있으니 개방열람실에서 어르신이 책을 읽고 신문을 보는 것이야 나무랄 데 없이 당연한 일. 노후에, 은퇴한 후에, 여가 시간에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노인의 모습은 작히나 좋으랴.

책 읽고 공부하는 어른의 모습이 나쁘지 않으니까 애초에는 그분들 사이에 앉는 것을 꺼리진 않았단다. 다만 열람실의 반 넘게 앉아 계신 어르신들 중에 남자 어르신들만 있는 게 조금은 의아했단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아이 눈에는 중장년의 남자들도 할아버지로 보일 터) 사이에 앉아 있기가 어려웠단다. 할아버지들은 끊임없이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오가는 여학생들의 다리를 쳐다보거나 신발을 다 벗고 앉아 계시거나, 양반다리를 하고 등에 기대앉거나 다리를 쩍 벌리고 걸터앉아 앞자리 여자들을 노골적으로 쳐다보곤 했다는 것. 정말 공부를 하러 온 것인지 잘 믿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어르신들 때문에 서둘러 자리를 옮긴 적이 많았다는데, 아유, 정말 왜들 그러신다니... 같이 속상했었다.

아무튼, 검색하던 아저씨가 컴퓨터를 떠난 후 자기 차례로 접속한 아이는 기함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아저씨가 오랫동안 검색하고 다운로드한 것이 야한 동영상, 몰래카메라 영상들이더라고 했다. 그가 찾은 목록이 주르륵 떠오르는 걸 보고 놀라 뒤돌아보니 그 아저씨는 다리샅을 주물주물 추스르면서 개방열람실로 가더라는 것. 집이나 다른 데서 그런 영상을 받아보면 아이피 추적이 들어오니까 도서관 컴퓨터를 사용한 모양이라는데.

아니 청소년 도서관에! 어른이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어른답지 못하게... 말 잇기 어려울 만큼 기가 막혔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아무튼, 어른이 어른답지 못하다고 탓하고 보니 사실 그 남자는 아이 아빠나 내 또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은 이미 ‘어른’이 된 지 아주, 아주 오래되었다.

 

내 나이가 어때서? 음, 진짜 어른 되기 딱 좋은 나이

기발하고 재미있어서 종종 들어가 보는 ‘나무 위키’의 ‘어른’ 항목에는 어른의 본래 의미를 이렇게 쓰고 있었다.

‘어른’이라는 말의 본래 뜻은 '나이를 먹은 사람'이 아니다. ‘어른’은 ‘얼운’이 변한 것인데, ‘얼운’은 ‘얼우다’라는 동사 어간 ‘얼우’에 접미사 ㄴ이 결합된 것이다. 그러니까 ‘얼운’은 ‘얼우는 행위를 한 사람’이라는 뜻이 되겠다. 그러면 ‘얼우다’라는 동사는 무슨 뜻일까? 이것은 남녀가 짝을 이루는 행위를 뜻한다. 즉 남녀가 결혼을 하면 서로 몸을 합하게 되고, 그 결과로 자식이 태어나는 것인데, 한국인 조상들은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여 ‘얼운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을 구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혼한 사람만 상투를 틀게 했다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어 어른의 정의는 “1. 확립된 자아를 가지고, 자유의지에 의해 행동하는 인간 2. 나이 드신 분. 높임말은 어르신. 가끔 이 지위를 이용해 명확한 설명 없이 사태를 해결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럴 경우 아랫사람은 말을 듣기는 해도 불만을 가진다. 이 경우는 그 어른이 개념이 없다고 보면 된다. 아니면 성인이 아니거나 3. 경제적 사회적으로 독립되어져야 하며 개인 혹은 가족을 부양의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고 써 놓았다.

 

조금 부정확할 수 있으나 어른이 그저 나이만 먹은 사람이 아닌 것, 어른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사태를 해결하는 경우는 어른이 아니라는 것만은 명확하게 설명한 셈이다.

나이가 많다고 어른이 되지 않는다거나, 나이가 벼슬이 아니란 것을 입 있는 자라면 누구나 말하는 지금, 어떻게 해야 아이들에게 진짜 어른처럼 보일 수 있나.

소위 어른들의 어른답지 못한 행태는 나도 수없이 보고 들었다. 같이 여행을 가게 되면 어른들은 자기들이 아는 것만을 목이 터져라 가르쳐댔고 옳고 그름에 대한 신념이 지나쳐 남의 의견을 잘 듣지 않았다. 음식값을 나눠 내거나 참가비를 정확하게 거두자는 합리적인 의견에는 고집을 세워 반대하고 일단 한턱을 쏘겠다고 단언하는가 하면 대신 그 자리의 온갖 발언권을 독점하고 싶어 했다. 남의 경험을 무시하고 하대하는 것은 물론 그 와중에도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생래적으로 거부했다. 자리의 중심에 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했고 리드할 수 없는 자리엔 아예 발들이기를 꺼려했다. 여기저기서 퍼온 그다지 웃기지 않은 유머를 퍼 날랐고 확인되지 않은 루머와 가짜 뉴스를 최신의 정보인 양 알리는데 열성이기도 했다. 젊은이들의 문화와 언어를 조금 알게 되면 신문물과 청춘의 생각을 다 이해하는 양 으쓱거리기도 했다. 나이를 훈장인 양 둘러차고 무례하게 행동하거나 사소한 일에 노염을 타고 자기의 경험을 완고하게 주장했다. 어른들에겐 공부가 필요해 보였다. 나도 물론 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였다. 진짜 어른들은, 어른답게 사는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갔을까.

 

Aging과 Grown up은 다르다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마음은 하나요, 느낌도 하나요. 그대만이 정말 내 사랑인데, 눈물이 나네요.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어느 날 우연히 거울 속에 비춰진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세월아 비켜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어른들은, 노래방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내 나이가 어때서? 내 나이가 어때서? 자문자답하고 있었다. 한 시절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부르던 이들이, 원더풀, 원더풀 아빠의 청춘을 부르던 이들이 이젠 술을 마시고 어두운 방에서 탬버린을 치며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라고 서로의 어깨를 추어주고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어 나오는 노래는 필경 아모르 파티 Amor Fati.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 세상에 뿌리며 살지. 자신에게 실망하지 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 파티.

아모르 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 운명애 運命愛. 니체가 했다는 그 말이 빠방빠방 파티에 쏟아지는 사이키 조명처럼 흘러나왔다. 어른들은 그렇게 인생은 지금이야, 소리치면서 아이처럼, 청년처럼 명랑하게, 또는 절규처럼 노래들을 불렀다.

 

'어른'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당신의 외로운 분투를 응원하며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박산호 지음  / 사진: 네이버 이미지, imdb

 

나 자신 이미 어른이면서 다른 어른을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언짢아하면서, 종종 젊은 사람들에게 어른 맞아요? 손가락질도 받으면서, 어른들끼리 머리 맞대고 앉아 서로를 잘 살고 있다고 추어주면서 어영부영하다가 여기저기서 ‘어른’이란 제목이 붙은 많은 것들을 발견했다.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보였고 <어른 도감>이라는 영화가 나왔다.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란 책과 <어른은 어떻게 돼?>도 잘 팔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어른들이 어른-되기를 성찰하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이없게도 필자들과 강연자와 주인공들이 나보다도 젊은 나이라는 것. 주섬주섬 책을 읽었다.

박산호는 ‘어른인 척’ 말고 진짜 느낌 좋은 어른으로 살아가려고 닮고 싶은 주위의 멋진 어른들, 반면교사로 삼아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라고 진저리를 치게 된 어른들, 아이들에게서 보이는 어른의 모습, 내가 만들어가는 어른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면서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를 썼다고 했다. 지금 내가 들어야 할 말을, 다른 어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거기에 있었다.

 

영어에 'been there, done that'이라는 표현이 있다. 거기 다 가봤고, 다 안다는 뜻으로 '내가 해봐서 아는데'와도 일맥상통하는 표현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해봐서 아는데'의 시대는 저물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으로서 지녀야 할 태도는 오히려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을 토대로 다져온 나의 믿음이 언제든지 틀릴 수 있고, 틀렸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유연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경험은 정말로 좋은 스승일까’ 중에서

 

내가 너보다 더 살아봤으니, 내가 너보다 더 많이 경험해 봤으니, 내가 너보다 더 많이 배웠으니, 라며 타인에게 뭔가 그럴듯한 말을 해주고 싶을 때는 한 번 더 입술을 깨물고 생각해 봐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은 과연 누가 부여한 것인가? 내가 말을 할 권리가 있다면 상대에게도 듣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상대를 생각하고 아끼는 마음에, 상대의 장래를 위한다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굳이 해서 이 관계를 망치는 것은 아닐까 돌아봐야 한다.

‘막말, 듣지 않을 권리 있습니다’ 중에서

 

어른의 역할을 하고 사라져가기

 

<어벤저스 엔드게임> 어른의 역할을 마치고 사라지는 영웅의 이야기   / 사진: 네이버 이미지, imdb

 

마블 영화 <어벤저스: 엔드게임>이 오래된 영웅들의 길고 긴 마지막 전쟁을 다루면서 끝났다. 평범하게 태어나 영웅으로 재탄생하여 싸우고 장렬히 산화하는 스물 몇 편의 히어로 시리즈는 그야말로 백전노장의 영예로운 사라짐을 보여주며 마감되었다. 어린 영웅, 여자 영웅들이 새롭게 태어나고 자라는 그 시간 동안, 롤 모델이 되어주고 어른이 된 자리에 서 있었던 아이언 맨, 캡틴 아메리카, 헐크 박사, 블랙 위도우, 토르가 뒤로 물러나거나 늙거나 죽으면서 젊은이들이 설 자리를 내주었다. 모든 시리즈를 함께 하며 자란 아이는 <엔드게임>을 보면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초기 영웅이 사라져가네. 시니어 세대의 영예로운 은퇴였어. 이제 그 어른들에게 배운 새 세대의 이야기가 이어지겠지.”

 

 

<어른도감> 어떻게들 어른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지 소녀의 눈으로 보게 한다 / 사진: 네이버 이미지, imdb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 <어른도감>을 찾아봤다. 아빠는 죽고 엄마는 떠나서 혼자 사는 고아 소녀에게 찾아온 어른 같지 않은 어른, 삼촌하고 빈 시간을 같이 나눠주고 천천히 차에 넣을 기름을 사러 걸어가는 그런 이야기. 아저씨는(삼촌) 어른이면서 왜 그래요?

맑고 슬픈 눈으로 물어보는 열네 살 어린아이 옆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그런 이야기였다.

집에서 길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도서관에서 우리가 나이만 먹은 노인이 될지 어른이 될지 어르신이 될지 사실 제일 열심히 공부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애들 말로 진짜 “뼈 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