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상이 무엇이든 혹시 곧 찾아올 이별이 두렵거나 우울하지는 않는가? 평생 나와 함께 할 것 같았던 모든 것이 하나씩 둘씩 나로부터 멀어져 가겠지만 아름답고 쿨(cool)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우리 50+세대들에게 매일 마주하는 모든 일상이 편안하고 만족스럽다고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궁금하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마치 호흡과 같아서 미처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감사할 일이 한 둘이 아니다. 잠에서 깨 스스로 일어나고 세수하고, 식사하고, 또 청소와 정리정돈 등의 집안일을 처리하고, 관공서 업무를 보고, 스마트폰을 활용하여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친구와 약속을 정해 만나고 하는 다양한 일상들 말이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백 가지는 족히 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마닥뜨리는 일상에서는 감사는 커녕 ‘꼰대’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듯 버럭질과 불평불만 일색이다. 자신을 낮추고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작은 것에 감사하고 대가를 바라지 말자며 주술을 외듯이 남발하는 우리의 계명은 공염불처럼 말로는 참 쉽다. 위에 열거한 한두가지 라도 스스로 수행이 어려워 주변을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언제든지 올 수 있음을 가끔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육체의 노화는 혼자 오는 법이 없이 우리 뇌의 해마는 기억력을 약화시키고, 고등 뇌는 합리적 사고를 전두엽은 인내력과 각종 감정 조절능력을 약화시키는 까닭이다.

 

 

불과 4-5년 전 우리의 기대수명은 100세라더니 최근에는 110세로 그새 기대수명이 늘어났다. 100세 이후의 생활은 국가와 사회가 마련한 제도에 의지한다 해도 지금부터 스스로 살아가야할, 많게는 50년에서 적게는 30년을 버럭질과 후회로 점철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를 리셋(reset)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바람직한 인생 후반의 삶을 기대한다면 말로만이 아니 실천적으로 지금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필연성이 존재한다. 먼저 아침에 일어나면 만나는 눈부신 햇살과 피부로 느껴지는 상큼한 바람결과 베란다에서 날 반겨주는 화초들의 향기로운 아침인사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의 무사함과 무탈함에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하자. 이 일상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당연한 것은 아니지 않나? 그리고 지금의 이 시기를 인생 제2의 적응기로 기존의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움을 기존의 것에 덮어 씌운다는 느낌으로 나의 현재 상황에 부합하는 새로운 대상/일거리/사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어떨까?

 

 

살아오면서 많은 목표한 것을 얻고 유지하지 위해 더 많은 것을 포기했다. 안도할 사이도 없이 그 동안 이루어 놓은 많은 것들과의 헤어짐이 예견된다. 그 이별과 상실의 대상은 재물일 수도 있고 관계일 수도 있고 특정의 사람일 수도 있다.

부족하고 빠듯한 삶 가운데서 그래도 재산이 늘어나 좀 모아진 시기는 50~60대이다. 이 시기를 정점으로 자신의 건강과 노화, 부모부양과 자식의 자립과 독립을 위한 지출로 우리의 평생의 피와 땀의 결실이 급격한 하향곡선을 타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생병이 나도록 아까워하거나 집착만 한다면 이로 인해 얻어지는 더 고귀한 본질을 놓치게 된다. 우리가 재물을 모은 이유는 미래에 요긴하게 잘 쓰려고 열심히 모으며 살아온 것이 아닌가? 남에게 손 벌리지 않는 상황에 감사하며 단순하고 쿨(cool) 하게 정리하자.

 

 

그 다음은 관계이다. 요즘말로 인싸(insider)와 아싸(outsider)로 구분되어지는 사회적 관계이다. 외국에서 해당하는 신조어로 FOMO(fear of missing out)나 JOMO(joy of missing out)라는 단어로 표현되기도 한다. 사회적 인간관계, 친구관계, 다양한 가족관계에 있어서 오랜 동안 공들여 온 관계에 자연스러운 변화가 찾아온다. 다행히도 이 상황은 예견되는 것으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처음엔 나를 찾지 않고 소홀히 하는 것에 분노하여 서운함, 괘씸함이 발심한다. 그러다 곧 포기와 무감각의 단계로 접어들 것이다. 나는 이런 단계를 불치의 병에서 명약을 발견하는 시기라고 이름 짓고 싶다. 분노와 서운함을 갖는 대신 그 시간에 새로운 대상이나 관계형성에 관심을 가진다면 우울감이 스스로 치유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병에 대한 면역력이 생기듯이 집착을 버려야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대상이 나타나듯이 말이다. 관계의 변화도 시간을 두고 적응하다 보면 이 또한 당연한 일상으로 여겨질 것이다.

 

다음은 사람과의 이별이다. 노화의 마지막 단계로 자연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불치병이 찾아온 경우 죽음은 예견되며 이를 맞이하는 당사자는 물론 가족을 포함한 주변인들도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몇 가지 단계를 거치게 된다.

 

 

자신의 예견된 죽음에 놀라지 않고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처음에 죽음을 거부하는 단계에서 분노와 함께 나의 죽음을 남의 탓으로 돌리게 된다. 왜 하필 나에게 아니면 왜 나만 죽어야 하는지 원통하고 화가 치미는 것이다. 그 단계가 지나면 협상(?)단계로 접어든다. 예를 들어 자식이 학업을 마칠 때 까지만, 또는 자식이 출가할 때 까지만 하는 식으로 내가 좀 더 살아야하는 핑계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상황을 핑계 삼아 일정 기간 죽음이 유예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일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되어 의사에게 또는 신에게 구차하리만큼 처절히 간구한다.

 

그러다가 인내심의 한계에 진이 빠지게 되면 삶에 대한 의지를 잃게 된 단계에 이른다. 죽음의 문턱에서 오히려 편안해지며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감사하는 아름다운 수용의 단계에 이르는 경우를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익히 봐왔다. 마치 먹구름에 가려진 한줄기 빛줄기(silver lining)를 찾아내듯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자세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된 삶 이후에 또 다시 우리에게 삶이 주어진다면 다음 생의 삶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