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침 우리는 월출산 기슭의 녹차 밭을 지나 백운동원림(白雲洞園林)으로 향했다. 남쪽 지방의 기후 조건이 차나무의 생장에 적합한 듯 지리산과 영암, 강진, 보성 등지에는 야생 녹차가 많이 자란다. 월출산을 배경으로 드넓게 펼쳐진 차밭도 진풍경이다. 다원 근처에는 월출산의 비경 백운동원림이 있다. 원림(園林)은 집에 딸린 정원이나 숲을 말하는데 월출산 옥판봉 기슭에 자리한 백운동원림은 조선 후기의 문인 이담로(1627~1701)가 지은 별서로, 월출산의 자연을 그대로 품은 소박하고 아름다운 정원이다. 숲속에 자리 잡은 까닭에 담장 바로 옆에 계곡이 흐르고 그 계곡의 물을 집으로 끌어들여 마당을 돌아나가게 한 '유상곡수'의 흔적이 남아 있다.

 

꽃과 사람으로 가득한 백운동원림

 

우리 외가 동네에도 뒷산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작은 시내가 되어 집집마다 흘러간다. 집 안을 흐르는 작은 개울에서 사람들은 아침이면 세수를 하고 하루를 시작했다. 일상생활에서 물과 관련된 모든 일을 그 작은 개울가에서 해결했다. 심지어 냉장고가 없던 여름엔 시원한 개울물에 김치통을 담가놓기도 했다. 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관개시설이다.

백운동원림은 겉에서 보기엔 소박한데 마당을 들어서니 작은 연못, 매화, 모란 등이 가득한 계단식 화단 등 갖출 것은 다 갖췄다. 이곳은 조선 시대의 선비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김상헌의 증손자이자 이름난 문인 김창흡, 김창집 형제가 백운동원림을 노래했고 이곳으로 소풍 온 정약용 또한 경치에 반해 초의선사에게 부탁해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자신은 그림에 시를 곁들였다. 정약용을 비롯한 시인과 묵객들은 이곳에서 자연과 차를 즐기며 세상의 시름을 잊었을 것이다. 문화재청은 백운동원림의 가치를 인정해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5호로 지정했다.

 

백운동원림 안의 작은 연못과 정원

 

초가와 하얀 모란이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다.

 

 

건물 벽에 누군가 월출산과 원림을 그려놓았다.                                       화단 가득한 모란과 작약꽃

 

원림의 아름다움에 반해 더 머물고 싶었지만 시간이 촉박해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월남사지로 갔다. 산기슭에 잡초가 자란 드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폐사지 같은 느낌이 거의 없다. 월남사터에 남아 있던 월남사지3층탑은 지금은 해체되어 모습을 볼 수 없다. 대신 임시로 지은 건물 안에 펼쳐 놓은 탑의 부재들을 볼 수 있다. 수직 상승하는 탑의 수평적 나열이라니...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다. 가건물에는 해체하기 전 탑이 담긴 걸개그림을 걸어놓았는데 부드러운 곡선미가 아름답다. 복원이 끝나면 꼭 와서 보리라 다짐한다.

 

 

월남지3층석탑 보수를 알리는 현수막 사진                                             해체해 놓은 석탑 부재들

 

드디어 월출산 산행이다. 산행의 출발지는 금릉경포대(金陵鏡布臺))다. 작은 폭포가 무명베를 펼쳐놓은 듯 하얗다. 금릉은 강진의 옛 이름이다. 나도 몇 년 전 여름, 아이들과 경포대 계곡으로 물놀이를 간 적이 있다. 작고 소박한 계곡이다. 우리는 경포대를 출발해 천황봉을 거쳐 천황사로 하산했다. 출발지에서 바람재까지는 완만한 산길이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다. 초록빛 나무들 사이로 피어난 동백꽃이 더위를 잊게 한다. 바람재에 오르니 사방으로 펼쳐진 풍경에 탄성이 절로 난다. 단지 한 시간 남짓한 산행으로 이렇게 탁 트인 전망을 볼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금릉경포대, 흐르는 물이 무명천을 펼쳐놓은 듯하다

 

등산로에 피어난 동백꽃 [사진 : 임정태]

 

바람재에서 천황봉까지는 바위들의 파노라마다. 봉우리마다 우뚝 선 기암괴석들을 보느라 눈도 마음도 즐겁다. 장군바위(일명 큰바위얼굴), 귀뜰바위, 돼지바위, 칼바위, 남근바위 등등, 사람과 동물, 사물의 이름을 딴 이름도 재미있다.

 

 

바람재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 [사진 : 임정태]

 

기기묘묘한 바위들 사진 [사진 : 임정태]

 

풍경, 사진 [사진 : 임정태]

 

일행이 멋진 풍경을 바라보는 모습 [사진 : 임정태]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풍경 [사진 : 임정태]

 

월출산의 정상 천황봉은 809m로 그다지 높지 않다. 하지만 바다에서 가깝고 드넓은 평야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 높이에 비해 등산하기 쉬운 편은 아니다. 산 능선을 따라 걷는데 산 가득 하얀 꽃이 피어 있다. 우리의 안내자 “인터넷검색” 선생에게 물으니 쇠물푸레나무라 알려준다. 월출산에는 애기붓꽃, 남산제비꽃 등등 여러 가지 야생화와 연분홍 자태도 고운 철쭉이 지천이다. 속세에서 흔히 보는 철쭉과는 사뭇 다른 수형, 진달래를 닮은 우아하게 뻗은 가지가 참으로 아름답다. 월출산에서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노각나무였다. 나는 월출산에서 노각나무를 볼 수 있으리라 상상도 못했다. 한국 고유종인 노각은 선비 같은 나무다. 고매하다 못해 청초하기까지 하다. 그 노각 몇 그루가 등산로에서 사람들의 발길에 치이고 오르내리느라 잡은 사람들의 손길에 죽어가고 있었다. 마음이 저리도록 안타까웠다. 천황봉을 지나 구름다리 앞에서 잠시 쉬다가 우리는 바위에 서 있는 염소 같은 동물을 보았다. 까만 염소네, 산양이네 의견이 분분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야생화 애기붓꽃 사진 [사진 : 임정태]

 

 

  

연분홍의 자태가 고운 철쭉, 사진[사진 : 임정태]                        수형과 수피가 아름다운 한국 고유종 노각나무[사진 : 임정태]

 

 바위에서 사는 염소(?) [사진 : 임정태]

 

드디어 구름다리다. 구름다리로 가기 전에도 건넌 후에도 거의 수직에 가까운 바위를 철제 난간을 잡고 오르내려야 한다. 구름다리가 전에 비해 안전해 보여, 안심하고 건넜다. 이제 기암괴석도 이 풍광도 마지막이다, 싶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마지막 하산 길도 만만치 않다.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나’ 하는 마음도 없지 않지만 그 생각은 잠시뿐이다. 월출산에 관한 여러 가지 감상 중 일행이 했던 한 마디가 월출산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 같다. “월출산은 어느 봉우리에서 봐도 풍경이 빠지는 데가 없어.” 그렇다. 월출산은 그런 산이다. 오죽하면 남해의 소금강이라는 별칭이 붙었겠는가. 넓은 들 한가운데 우뚝 솟은 기암괴석, 그 사이로 달이 떠오르는 풍경을 담은 이름이 영암(靈巖)과 월출산(月出山)이다.

 

구름다리 너머로 펼쳐진 영암 들판 사진

 

하산 전에 바라본 기암괴석

 

나는 이번에 세 번째로 월출산에 올랐다. 그럼에도 월출산은 처음 오르는 듯 새로웠다. 이것이 자연의 신비가 아닐까. 이번 여행길은 스무 살 초반에 만나 30여 년을 멀고도 가깝게 지낸 사람들과 함께했다. 그들과 이틀을 보내며 오래된 사람들의 새로운 모습도 보고, 그들을 더욱 깊이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산행 팀의 보배 조아무개 선생과 불교미술 등을 공부한 후배들 덕분에 가는 곳마다 풍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 여행이 더욱 풍성했다. 고마운 마음이다. 나이 들며 세상의 잣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만나면 그저 즐거운 사람들이 있어 내 삶이 조금은 더 여유롭고 근사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