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음이에요> <어느 날,>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은 ‘미하엘 엔데’의 글에 ‘프리드리히 헤헬만’이 그림을 그린 책이다. 그림책이지만 인생의 후반전을 생각하고, 죽음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나이의 어른들에게 더 큰 울림이 있을 것 같다.

 

 

오래된 작은 도시에서 결혼을 하지 않은 할머니 ‘오필리아’가 혼자 살고 있었다. 오필리아의 부모님은 딸이 커서 훌륭한 연극배우가 되기를 바라며 연극 속의 주인공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 연극배우가 될 수는 없었다. 대신 무대 앞 작은 상자 안에 숨어서 배우들이 대사를 잊어 말문이 막히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대사를 불러주는 일을 하며 살았다. 그런데 시대가 변해서 사람들은 작은 마을의 극장 대신 대도시의 극장을 선호하게 되었고, 작은 극장은 문을 닫고 배우들도 떠난다.

마지막 공연이 끝난 날, 모두가 떠난 텅 빈 극장에 홀로 남아있던 오필리아는 주인 없는 그림자를 만나게 된다. 그날부터 오필리아는 주인 없는 그림자들, ‘그림자 장난꾼’ ‘무서운 어둠’ ‘외로움’ ‘밤앓이’ ‘힘없음’ ‘덧없음’ 등을 받아들이며 함께 살게 된다. 그러다가 그림자들끼리 갈등이 생겨 싸우자 오필리아는 위대한 시어로 된 연극 대사를 가르쳐 외우게 하고, 그림자들은 희극과 비극을 모두 배워 나간다. 얼마 후 집 주인이 수상한 오필리아를 집세를 핑계로 쫓아낸다. 정처 없이 걷다가 바닷가에서 잠시 쉬는 오필리아를 그림자들이 연극으로 위로 한다.

그 후, 오필리아는 그림자들과 시골마을을 찾아다니며 공연을 해서 유명해진다. 그동안 번 돈으로 작은 자동차를 마련해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이란 글자도 세겨 넣었다. 그래서 더 넓은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작은 마을들에서 그림자극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그림자보다도 훨씬 더 어둡고 큰 그림자를 만난다. 그의 이름은 ‘죽음’!

‘죽음’은 “나를 받아들이고 싶소?”하고 묻는데 오필리아는 죽음도 마다않고 받아들인다. “그래, 나한테 오려무나.”

오필리아가 눈을 떴을 때,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오필리아가 받아 준 그림자들이 화려한 빛깔의 옷을 입고 오필리아를 맞이해 주었다. 그림자들이 오필리아를 데리고 간 곳엔 커다란 황금빛 글자로 ‘오필리아의 빛 극장’이라 적혀 있었다. 오필리아와 그림자들은 인간의 시어로 공연을 하고 자비로운 하느님도 가끔 이곳에서 연극을 보았다고 한다.

 

오필리아는 연극을 사랑해서 하잘 것 없는 작은 일이라도 연극과 관련된 일을 꼭 하고 싶었던 간절함으로 살았다. 부모님도 다른 가족도 없는 그녀의 인생은 쓸쓸했으나 갈 곳 없이 떠도는 그림자들을 품어주는 따뜻함과 역경을 새로운 기회로 만들어 내는 지혜로 잠시 행복하고 즐거운 새 인생을 살기도 했다. 세월은, 죽음은 그런 오필리아에게도 찾아왔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지난 8월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생애전환 문화예술교육 지원 사업 <문학과 함께 한 달 살아보기>에 대한 정보를 보고 22년 된 책모임 ‘끄덕끄덕’이름으로 신청했는데, 서류심사와 면접을 통과해서 선정되었다.

 

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정한 주제는 ‘삶과 사랑, 그리고 마무리’ 이다. 우리 나이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마지막 마무리 과정인 글쓰기만 남겨 놓고 있는데, 우리의 삶은 죽음과 더불어 사랑이 함께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아 가고 있다.

지난 토요일엔 북 스테이 과정으로 ‘춘천의 상상마당 스테이’에서 1박을 하며 토론을 했다. 그때 한 회원의 제안으로 ‘죽음을 만나 민낯으로 걸어가는 나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졌다. 아직 그런 걸 쓰고 싶어 하지 않는 회원도 있었고, 자기 자신에게 보다는 죽음에게 편지를 쓴 회원도 있었지만, 죽음을 받아들이는 우리 스스로의 태도를 준비한 셈이었다.

오필리아가 찾아온 죽음을 거부하지 않았듯이, 우리는 스스로의 인생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지 않고 죽음 앞으로 당당하게 나가기를 응원하고 있었다.

 

하루하루는 짧지 않은데도 긴 세월들은 어찌나 빠르게 지나갔는지 친구들도 나도 제 나이를 모를 때가 많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우리도 오필리아처럼 죽음을 만나게 될 것이다. 스스로가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는 준비했는데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어느 날,> 은 작곡가이자 가수인 ‘이적’이 쓰고 ‘김승연’이 그림을 그린 책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 라는 문장이 반복해서 여러 번 나온다. 아이는 학교를 오가며 집에서, 약수터에서, 할아버지가 일하던 양복점 일터에서 여전한 할아버지의 흔적을 보고 있는데 할아버지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우주 저 먼 곳에서 왔던 할아버지가 그곳으로 돌아가셨다 생각한다.

죽음을 소재로 한 그림책은 많은 편이다. 죽은 가족과의 이별을 담담하게 표현한 것도 있고, <어느 날,>처럼 짐짓 죽음을 모르는 척 에둘러 보여주는 책도 있다. 그래도 이 책을 소개하고 싶은 이유는 손자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줄 수 있었던 할아버지의 삶이 보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떠나가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남겨줄 기억의 흔적이 아름답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만약, 죽음에 대해 두려움으로 잠 못 드는 어린 아이가 있다면 <나는 죽음이에요 –엘리자베스 헬란 라스 글/ 마린 슈나이더 그림/ 장미경 옮김/ 마루벌>과 <나는 생명이에요>를 읽어 주고 얘기를 나누면 어떨까? 천천히 음미하며 글과 그림을 읽다 보면 죽음이 필요한 이유도 느끼게 된다. 죽음이 없다면 새 생명도 없을 것이므로...

 

‘문학과 함께 한 달 살아보기’를 하며 읽은 <나는 나를 간질일 수 없다 –이희중 시집> 중에 ‘상가(喪家)에서’ 란 시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

 

오래오래 살아서

내가 그들 곁에 있다는 사실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고

그보다 더 오래오래 살아서

지긋지긋한 일이 될 때까지

견뎌야 한다

그러고도 더 오래오래 살아서

내게도 그들이 지긋지긋한 존재가 될 때까지

더 견뎌야 한다

그래야 순순히 작별할 수 있다

 

유족과 조객들이

영안실에서 밤새 웃고 떠들며 논다

고인도 그 사이에 언뜻언뜻 보인다.

 

작가와의 만남 때 이 시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많이 아픈 부모님이 요양원에 계시는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고 하셨다. 어떤 이는 지긋지긋한 일이 될 때까지 견뎌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 지긋함 이전에 순순히 작별하는 쪽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부.케>도 함께 읽었는데,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결국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것과 다르지 않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이며, 어떻게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는 것인지 그 답은 각자에게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인생 마지막의 여러 가지를 스스로 정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