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 달 쯤 전, 갑자기 눈앞에 뭔가가 보였다. 양념이 튀었나, 먼지인가, 안경알을 먼저 닦았다. 그래도 어른거려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나 해서 후 불다가 깨달았다. 그거구나, 비문증! 눈앞에 먼지나 벌레 같은 게 떠다니는 것,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위를 보면 위에 있고, 옆을 보면 옆으로 따라 움직이는 것, 일명 날파리증. 특별한 이유 없이도 생기는, 흔한 나이 듦의 증상이라 했고 그러므로 특별한 치료법도 없다고 들었다. 아무려나. 그러려니, 했다. 사람들이 늙고 치명적인 병에 걸려 오래 앓는가하면 돌연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자주 듣는 날들이었으니까. 눈앞에 검은 뭉치가 따라다니는 증세정도는 사실 너무 경미해서 어디다 대고 말할 일도 못되었다. 생로병사의 흐름이 이리도 엄정했다. 올해 여름이, 가을이 계속 그랬다. 부음訃音이 자꾸 당도했다.

 

허수경 시인, 오래된 영혼이 혼자 가는 먼 집

볼 수도 만질 수도 싸우고 울 수도 있던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곳으로 떠나버리는 것,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갔다는 소식, 10월 3일, 시인 허수경의 부음을 들었다. 허수경, 그의 생전에 우리는 얼굴을 마주본 적도 손 한번 만져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알던 정다운 이가 떠난 것처럼 쿵 마음이 내려앉았다. 아마도 그와 내가 ‘동갑’의 ‘여자’라는 것과 오랜 세월 마음 깊이 그의 시들을 좋아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이제 부모상을 당하는 것만큼이나 우리 동년배도 불쑥 세상을 등질 수 있다. 아니, 이젠 요절도 돌연사도 아닌 나이가 되었다는 느낌도 함께. 아무튼 일면식은 없었어도 같은 해에 태어난 나는 그녀의 시집을 사서 읽으면서 같은 길이의 세월을 몸에 새겨왔다. 반세기 넘은 우리 나이, 먼지처럼 바람처럼 떠났다는 부고를 끌어안고 여기저기 꽂힌 허수경의 책들을 찾아 모았다. 여섯 권이 손에 잡혔다.

 

 

1988년 허수경의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가 실천문학의 시집 57번째로 출간되었을 때, 그녀나 나도 이십 대 창창한 젊은이였다. 아직 볼 살이 주름지지 않았고 짧은 머리칼은 까맣게 반짝이는.

 

산 가시내 되어 독 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 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폐병쟁이 내 사내’를 읽을 때부터,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시를 동갑의 여자가 썼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죽음과 슬픔이 차지게 반죽되고 단도처럼 쨍 하니 빚어진 시를 읽으면서 이 사람은 할머니야, 주모야, 도저히 못 따라가겠다, 싶으면서 이십 대가 지나갔다.

서른 살 초입에 들어서면서 1992년에 나온 <혼자 가는 먼 집>을 샀다. 제목부터 처연했다.

 

혼자 대낮 공원에 간다.

술병을 감추고 마시며 기어코 말하려고

말하기 위해 가려고, 그냥 가는 바람아, 내가 가엾니?

삭신은 발을 뗄 때마다 만든다, 내가 남긴 발자국, 저건 옴팍한 속이었을까, 검은 무덤이었을까, 취중두통의 길이여

 

환멸아, 네가 내 몸을 빠져나가 술을 사왔니?

아린 손가락 끝으로 개나리가 피는구나.

나, 세간의 블록담에 기대 존다.

 

나, 술 마신다

이런 말을 듣는 이 없이 했었다.

나, 취했다, 에이 거지 같이

한 채의 묘옥과 한 칸의 누울 자리 비천함! 아가들은 거짓말같이 큰 운동화를 사 신었도다.

 

‘흰 꿈, 한 꿈’을 읽었고 ‘쉬고 있는 사람’을 입 끝에 올려 외우면서 서른 너머 한 시절이 술처럼 눈물처럼 지나갔다. 친구들과 앉아서 환멸아, 네가 나가 술을 사왔니? 농담처럼 말했다. 낳아놓은 아가들이 무순처럼 막 자라났다. 표제작 ‘혼자 가는 먼 집’이야 헤아릴 수 없이 여러 번 일기장에 쓰였다. ‘치병과 환후’를 각각 따로 벌려 놓으면서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은 마음속에 관용구로 자리 잡았다. 삼십 대가 시 구절처럼 킥킥, 흑흑, 지나갔다.

 

인과 연, 다음 생을 받기까지 49일

사십구재 四十九齋. 영혼이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기를 기도한다는 그 49재를 직접 본 적은 없다. 영화 <신과 함께, 인과 연>편에서 저승차사가 망자와 함께 여기 저기 판관을 따라 다니며 이승에서의 업보를 만나고 풀고 건너면서 49일 동안 중음을 떠도는 것을 보았을 뿐. 검색해서 공부했다. “사람이 죽으면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49일 동안 중음(中陰:죽은 후 다음 생을 받기까지의 기간)의 상태를 맞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 다음 생을 받을 연(緣)이 정하여진다고 하여 7일마다 불경을 읽고 부처님께 공양하는 의식을 말한다. 즉 죽은 자로 하여금 좋은 생을 받기를 바라는 뜻에서 49일 동안 이 재를 지내는 것이다.”

 

11월 20일, 북한산 중흥사에서 허수경의 49재가 열린다는 소식도 부음을 들은 것과 똑같이 SNS 포스팅에서 봤다. 날보고 오라는 권유도 없었고, 누구든 같이 가자는 약속을 하지도 않았다. 그 자린 허수경과 음으로 양으로 마음 나눈 친구들과 시인 소설가 작가들이 모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일 밤, 나는 가리라 작정하고 잠들었다. 부르지 않는 자리에는 못 가고 쭈뼛거리는 성정을 가진 편인데도 꼭 가서 작별의 인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나 가라앉지 않았다. 스스로도 신기했다. 어쩌면 이번 생 말고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었을지도 몰라. 아니면 다음 생, 다다음 생애라도.

뭐, 독자로도 충분했다. 10월 3일 부음을 듣고 꺼냈던 책들을 48일 동안 다시 읽었으니.

젊을 때부터 이미 오래된 영혼이었던 그녀가 1992년 독일 뮌스터로 떠나 더더욱 오래된 영혼 쪽으로 몸을 틀어 고대 근동 고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던 뉴 밀레니엄의 첫해에 펴낸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를, 무덤 속 시간 같은 제목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을 배낭에 넣었다. 친구 아닌 친구, 언니 같은 동갑내기 시인의 가는 길에 작별의 인사를 하러. 가을 단풍은 다 졌으나 햇볕이 환한 겨울의 초입, 북한산이다.

 

나는 춤추는 중, 그리고 불취불귀

 

 

구파발역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이십 여분, 북한산 국립공원 출구를 지나서도 이십여 분, 가을빛 다 져버린 산의 입구에서 내려 중흥사를 향해 삼십여 분 산길을 걸었다. 옆 계곡엔 얼지 않은 물들이 옥빛 그늘을 만들며 흘렀다. 앞서가는 이도 뒤이은 이들도 49재로 가는 일행은 검은 옷 일색, 내려오는 이들은 모두 찬란한 등산복차림이었다. 아, 유명한 사람 이름이었어, 이 사람들 거기 가나보다. 내려오는 이들이 말했다. 중흥사 입구 계곡 두 나무 사이에 ‘허수경 시인 원적 49일 추모재’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폐사지에 새로 세운 듯 절이 한옥처럼 열려 있었다. 허수경 시가 적힌 보랏빛 종이 두 장을 받아들었다. 절 마당 흙바닥엔 누런 개 한 마리와 이마에 불을 켠 듯 점이 찍힌 검은 개가 널브러져 누운 채 눈만 굴리고 있는 오후 2시.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스며들 듯 절 방석에 앉았다. 사람이 많아 자리를 좁혀 촘촘히 끼어 앉았다. 옆에도 뒤에도 등산객들이 말한 것처럼 이름을 익히 아는 작가들이 보였다. 오래 못 보던 이들은 누군가 죽었을 때, 그때야 만난다.

 

 

동명스님이 재의 시작을 알리고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의 오은 시인이 허수경의 문학세계를 차분하면서도 다정하게 젖은 음성으로 들려주었다. 진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일하다가 시집을 낸 해와 제목을, 독일로 떠나 한국을 향해 펴낸 시집 제목들을, 54년 동안 폐허와 유물을 발굴하며 공부하다 병으로 멈춘 시인의 행로를.

문학과 지성사 대표이자 문학평론가 이광호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지금 우리는 시인을 보내지만 다시 조용히 시인을 기다리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저 사람이 언제 문지의 대표가 되었는지, 에세이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용산>의 저자와 동일인이 맞나, 잠시 생각했다.

분위기가 차츰 가라앉아 누군가 건드리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을 때, 동명스님이 짐짓 말씀하셨다. 49재는 이제 고인이 좋은 곳으로 떠나는 날이니 울지 말고 웃어도 좋다고. 명랑 하라고. 함성호가 ‘혼자 가는 먼 집’ 시 전문 사이사이에 추모의 말과 기억의 말을 넣어 당신과 킥킥을 호명해 내었는데 사람들이 웃기도 했다. 이병률이 보랏빛 종이에 쓰인 시 두 편을 읽어주었다.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불취불귀 중

 

나 혼자 노는 날 나의 머리칼과 숨이

온 담장을 허물면서 세계에서 다가왔다

나는 춤추는 중

얼굴을 어느 낯선 들판의 어깨에 기대고

낯선 별에 유괴당한 것처럼.- 나는 춤추는 중.

 

흙으로 물로 불로 바람으로 돌아가는 무상계

그리고 절 법당, 보일러 같은 것은 돌아가지 않아 두꺼운 절 방석을 뚫고 오는 엉덩이 냉기와 북한산 자락에서 들어온 바람이 무릎마저 차게 굳힐 무렵 신비하게도 프랑스말로 저 두 개의 시 구절이 울렸다. 옛 수메르 어를 해독하며 한국어로 쓴 허수경의 시가 북한산 법당에서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낭독되는 순간, 아, 살아 있는 여기가 어디인가, 싶었다.

추모시를 읽는 그녀의 시인 친구들은 마침맞게도 기름기 잘잘 흐르지 않아 좋았고, 육중하게 무거워 보이지 않아 더 좋았는데, 영정사진 속 허수경의 쓸쓸한 듯 바람처럼 바삭거리는 눈빛과도 거의 닮아 있어 참 좋았다.

동명스님의 염불을 따라 법요집 무상계를 외며 한 사람 한 사람 법당 한쪽 영정사진에 가서 헌화와 헌주를 하고 두 번 절을 했다. 세 사람이 한 줄로 서서 마지막 인사를 전하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무상계가 울렸다.

 

 

영가시여, 그대의 머리카락 손톱 이빨 그리고 가죽 살 힘줄 뼈 때 같은 육신은 다 흙으로 돌아가고,

침과 콧물 고름 피 진액 가래 눈물 원기와 오줌 같은 것 들은 다 물로 돌아가고,

몸의 더운 기운은 불로 돌아가고 활동하던 기운은 바람으로 변하여

네 가지 요소가 다 각각 지수화풍으로 흩어져 제자리로 돌아가는 법이니

오늘날 영가의 돌아가신 몸이 어디 있다고 하리오.

영가여, 이 몸뚱이는 네 가지 요소로서 거짓되고 헛된 것이니 조금도 애석해 할 것이 없습니다.

 

무상계 대목 하나하나가 다 삶과 죽음의 경계와 몸과 영혼의 인연과 소멸을 말하고 있었다. 흰 국화 한 송이 영정에 올리고 한 잔 술을 세 번 돌리면서 동명스님이 꼭 허수경 영가뿐 아니라 다른 영가들의 천도를 빌어줘도 좋다고 하셔서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16년 키우다 떠난 꼬동이, 허수경 떠나고 삼일 후에 떠난 K선배의 영가까지 마음에 불러 기도했다. 좋은 곳이 어딘 줄 모르나, 부디 좋은 곳에 가시라.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그러므로 무명이 없어지면 선악의 행업이 없어지고

선악의 행업이 없어지면 고정관념의 의식작용이 없어지고

고정관념의 의식작용이 없어지면 명색이 없어지고

명색이 없어지면 여섯 가지 감관이 없어지고

여섯 가지 감관이 없어지면 감촉이 없어지고

감촉이 없어지면 지각이 없어지고

지각이 없어지면 애욕이 없어지고 애욕이 없어지면

탐취심이 없어지고 탐취심이 없어지면 업이 없어지고

업이 없어지면 생이 없어지고 생이 없어지면 늙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는 고뇌도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없어지고, 없어지고, 없어지는 무상계가 시처럼 좋았다. 마지막으로 허수경의 시집을 만들고 잊힌 책을 복간하고 독일 뮌스터에 가서 수목장까지 치르고 돌아온 김민정 시인의 송사가 시작됐다. 마치 옆에 두고 있듯이, 얼굴 보고 말하듯이, 언니, 잘 가, 언니 영정사진을 찾으면서 내 영정사진도 이참에 마련해놨어, 로 시작된 송사는, 진짜 마지막 작별이어서, 좋은 마음으로 명랑해지기로 약속한 마음을 서러워지게 만들어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완전한 작별, 정녕 소멸로 가는 인사를 끝으로 모두 절 마당 끝 소대 앞에 모였다. 해가 설핏 스러져 산마루 위 절 끝은 손가락이 시렸다. 친구들이 가져온 보랏빛 꽃을 태우고 독자들이 쓴 편지를 태우고 망자가 신었던 신발과 옷을 태웠다. 소대 안에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스님이 마지막 사진을 찍자고 했다. 모두가 모여 있을 때 으레 하기 마련인, 김치, 치즈, 스마일, 브이, 파이팅, 같은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찰칵, 허수경 없는 단체사진이 찍혔다. 동명스님이 저기 공양간에 제 지낸 과일과 떡이 있으니 가져가도 좋다, 고 해서 우물우물 걸어가 배 한 개, 자몽 한 개, 떡 두 조각을 넣었다. 일행이 없었으므로, 산을 돌아 나오는 길에도 말 한 마디 할 필요가 없었다.

말을 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아직 불타고 있는 소대를 등지고 내려오면서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다 좋아하는 허수경의 그 시,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을 경 읽듯 외우며 내려올 수 있었다. 이제 다시, 이토록 울음 가득하나 뜨거운 시를 쓰는 사람은, 오래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