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만난 사람 2편 
천리마택배 장근현 어르신의 천진난만 ‘환동(還童)’으로 세상 살기

 

장근현 어르신은 평생을 떠돌며 살았다. 자발적이라기보다는 시대 상황에 떠밀린 어쩔 수 없는 '떠돎'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어르신은 1944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신의주는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의 단동시와 마주하고 있는 한반도의 최서북단의 도시이다. 기억에도 없는 3살 때 어르신은 가산을 모두 정리한 부모님을 따라 월남을 하였다. 고향을 떠난 이유는 나중에 부모님으로부터 들어 알게 되었다. 당시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의 횡포를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월남하여 정착한 곳은 서울의 청파동이었다.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한 지 3개월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북한군 점령기의 경험은 끔찍한 것이어서 51년 1월 추운 겨울에 어르신의 가족은 서울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거의 보름 만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객차와 석탄차 혹은 화물차를 번갈아 타야했던 고난스런 여정이었다. 밤을 새워 기차 지붕에 올라타고 가기도 했다. 이튿날 아침이면 누구누구네가 지붕에서 떨어졌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피난민들 사이에 돌았다. 어떨 때는 기차가 더 이상 가지 않는다는 말에 모두 내려 기약 없는 다음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날도 있었다. 추위는 모질없고 배고픔은 뼈에 사무쳤다. 그 통에서도 어린이다운 호기심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어서 대구역에선 난생처음 보는 전쟁 물자 수송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다 식구들과 헤어지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극적으로 다시 만난 누나에게 등짝이 얼얼하도록 얻어맞았다고 한다.

 

 

부산에서는 2년 가까이 머무른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3학년으로 입학하여 2년 정도를 다니다 다시 춘천으로 이사를 했다. 부모님의 사업이 여의치 않아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과정에서 선택한 곳이었다. 어디나 한 반에 백 명이 넘는 학생들로 들끓었고 도시락을 싸오는 학생은 4분의 1이 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춘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인천으로 갔다. 가세는 더욱 기울어 더 이상의 공부는 불가능하겠다고 생각할 무렵 뜻하지 않게 친구로부터 금전적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학업을 포기하고 일찍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몹시도 가난하던 고학생 친구였다. 평생의 은인이다. 친구의 성의를 생각하여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악전고투를 해가며 힘들게 대학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그 뒤 십년 가까운 직장 생활에도 떠돎은 계속되었다. 충청도로 서울로 직장의 필요에 따라 옮겨 다녔다. 본인이 직접 사업을 하면서는 더욱 역마살이 기승을 부렸다. 격변기의 상황은 그로 하여금 한 곳에서의 안주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와중에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하숙집 주인의 딸이었다. 용기를 내어 고백을 하자 평소 어르신의 성실한 생활 태도를 눈여겨보았던 장인과 장모는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거친 역사의 소용돌이를 숨 가쁘게 헤쳐 나오신 분답지 않게 장근현 어르신의 표정은 해맑다. 장난기 가득한 개구쟁이를 닮았다. 동료들에게 끊임없이 장난을 걸고 또 받는다. 그래서 그의 주변은 늘 왁자지껄한 소란과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어르신에게 그 비결을 물었다.

 

"뭐 특별한 게 있나요? 그렇게 보였다면 지치고 힘들었던 고등학교 시절 어느 날 '까짓 놈의 세상 아무리 힘들게 해봐라. 나는 즐겁게 살 것이다!'라고 마음먹은 적이 있는데 그 결심의 결과쯤 되겠지요. 누구나 다 힘든 게 세상살이지만, 너무 환경에 억눌려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울 봉은사 추사의 글씨(좌), 천리마택배단 활동 중인 장근현 어르신(우)

 

어린 시절에 떠나왔으면서도 평안도 억양이 강하게 스민 어르신의 설명을 들으며, 기자는 문득 서울 봉은사 (경)판전에 걸린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떠올렸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스레 땅바닥에 지팡이로 굵게 쓴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유머러스하기도 한 그 '판전(板殿)'이란 두 글자를 두고 서에를 아는 사람들은 추사 김정희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서예에 있어 최고 경지는 환동(還童), 즉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붓글씨처럼 혹은 추사처럼 장근현 어르신의 천진난만함은 서툴거나 경박함이 아니라 거친 세월에 자신이 지닌 본래의 모습을 빼앗기지 않고 지켜온 곰삭은 지혜이자 달관 같은 것이 아닐까? 어르신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교회에서 집사 일을 맡고 있다고 한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아마 모태 신앙이라는 부인의 영향이 아닐까 추측했다. 지금 어르신에게 가장 절실한 소원을 묻자 아직 결혼하지 않은 과년한(과년하다고 어르신이 생각하는) 따님을 결혼시키는 일이라고 했다. 어르신이 살아오신 방식대로 오로지 정직함만을 세상사는 방식으로 가르쳤다고 자랑을 곁들였다.

 

천리마 택배 일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엔 "좋지요. 나와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농담도 주고받고, 매일 새로운 주문처의 사람들도 만날 수 있고, 어떤 인연이든 인연은 소중한 것이거든요."하며 경쾌하게 받아주었다. 어르신에겐 사람들과의 어울림이 모든 일의 첫 번째 가치인 것 같았다. 그 어울림의 인연 속에 기자이자 어르신 일자리 지원단인 나도 포함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