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즘 일주일에 한 번, 월요일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센터에 출근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과 작성을 돕고 있습니다. 30여명의 전문 상담사들이 요일과 시간을 나눠서 일주일 내내 돌아가며 자원봉사로 상담실을 지키고 있는데 아무래도 연세가 높은 분들의 방문이 많은 편입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19세 이상의 사람이 앞으로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가 됐을 때를 대비해 연명의료 및 호스피스에 관한 자신의 뜻을 직접 문서로 작성해 밝혀두는 것입니다. 2016년 2월 법 제정에 이어 시범기간을 거친 후 올 2월 4일부터 전면 시행에 들어간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른 등록기관을 직접 방문해 상담한 후 작성, 등록하게 됩니다.

지난주에 만난 여자 어르신은 75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운 피부에 귀염성 있는 얼굴을 하고 계셨습니다. 상담과 함께 의향서를 작성해 등록까지 마치고 나니, 이제야 큰 짐을 덜어낸 것 같아 홀가분하다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인생사가 흘러나옵니다. 마침 다른 내담자가 없어서 어르신의 이야기에 마음 놓고 푹 빠져들었습니다.

서울 동대문시장 가게 한 칸에서 평생 장사를 하며 자식들 키웠고, 나이 많고 힘도 들어 3년 전에 장사를 접었는데 집에만 있으려니 너무 우울해서 꼭 죽을 것만 같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글쎄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공부를 한 번 해보라는 이웃 사람의 권유에 귀가 솔깃해져서는 무작정 방송대학에 입학원서를 냈다고 합니다. 공부가 어렵고 힘이 들면서도 어찌나 재미있던지 눈 깜짝할 사이에 졸업반이 되어서, 이미 졸업논문은 제출했고 8월에는 졸업사진도 찍는다고 합니다.

스터디 모임에 나가 동급생들을 만나는 시간이 제일 재미있고 좋았다면서 나이 많은 덕에 언제나 큰 누님에 최고 왕언니였다며 깔깔 웃습니다. 어르신의 눈동자는 반짝거렸고 얼굴에서는 빛이 나는 듯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고, 거기다가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성취한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행복한 기운이었겠지요.

 

50+들과 수업을 할 때, 앞으로 아이들 뒷바라지도 다 끝나고 일에서도 해방되어 여유가 생기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으면 1위는 언제나 여행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무언가 배우고 싶다는 의견이 제일 많이 나옵니다.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돈 걱정 식구들 걱정만 없다면야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어디론가 떠나서 누리는 자유로움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꾸는 것이겠지요. 배우는 일 역시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미루고 묻어두었던 자신의 꿈을 펼치는 일이니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정이 있어 학교 공부를 제때 하지 못해 다시 시작하는 것부터 죽기 전에 꼭 한 번 도전해보고 싶었던 공부, 취미∙여가에 관련된 공부, 자신의 관심 분야를 철저히 파고드는 깊은 공부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공부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어려서는 공부, 젊어서는 일, 늙어서는 여가로 구분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과 일과 여가가 분리된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만 하면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젊은 사람이 일만 하면서 살 수도 없고, 또 나이 들었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24시간 쉬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인생주기에 있든 연령에 대한 편견 없이 원하는 공부를 하고 일을 하며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사회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사회입니다. 그러니 나이 들어도 배움의 욕구가 있고, 실제로 적극적으로 배움에 나서는 일은 지극히 정상적이며 상식적인 일입니다.

 

 

하나, 뭘 배우지?

내가 가장 배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우선인데 무엇보다 나의 관심사와 경제적인 사정, 건강상태, 생활목표에 맞아야 합니다. 관심도 별로 없는데 배우자나 친구를 따라 무작정 시작하면 흥미를 잃기 쉽고, 경제적인 부담 역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공부와 과제에 대한 적당한 스트레스는 생활의 활력을 가져오고 성취동기로 작용하지만 지나치면 몸과 마음에 무리가 옵니다.

 

둘, 배워서 뭐할까?

배움의 목적이 분명하면 한 단계 나아갈 수 있습니다. 건강관리나 가족관계, 여가 활용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을 배울 수도 있지만, 점수나 수료증과 무관하게 공부 그 자체가 좋아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또 무언가를 배워서 자원봉사활동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도 있고 시민운동처럼 사회 변화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 활동에 나설 수도 있습니다. 은퇴가 빨라지고 건강하게 오래 살게 되면서 배움의 목록이 점차 길고 다양해지고 있지만 그 공부가 본인을 성장시키고 성숙한 어른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이기적인 공부, 이름뿐인 공부로 끝나게 됩니다.

 

 

셋, 어디서 배우면 좋을까?

요즘은 평생교육의 시대라서 적극적으로 찾아보면 큰 돈 들이지 않고 배울 곳이 참으로 많고, 주위 친구들과의 정보 나눔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특히 50+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의 장이 늘어나고 있으니 반가운 일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50+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겨냥해 창업이나 재취업에 치중한 과정들이 많이 운영되고 있는데 지나친 상업화는 경계해야 합니다. 아무리 비싸도 이 과정만 마치면 일자리를 얻고 일거리가 보장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믿을 만한 교육기관을 찾아내는 신중하고 밝은 눈이 필요합니다.

 

넷,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공부…

많이 배운 사람이 까다롭고 대하기 힘들다고들 합니다. 반대로 말 안 통하는 무식한 사람이 무섭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30년 가까운 노인복지 현장 경험으로 보면 배움의 분량과는 상관없이 늘 온화한 품성으로 푸근하게 품어주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사납고 무례해서 곁에 다가서지 못하게 만드는 분들도 있습니다. 존경 받는 어른, 본받고 싶은 선배가 되는 길이 반드시 눈에 보이는 공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니 나이 들어서의 공부가 반드시 과목을 정해서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 앉아서 하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더 예의나 배려와는 담을 쌓고 살면서 ‘배우면 뭐하나, 배운 사람이 더해!’ 이런 말만은 듣지 말아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