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눈 뜬 꿈'을 꾸자" 정진홍 울산대 석좌교수, 전 아산나눔재단 이사장

 

 

어렸을 때는 꿈을 먹고 자랐다. 젊어서는 그 꿈을 실현하려는 꿈을 꾸며 뛰었다. 장년에 이르러서는 꿈을 접을수록 현실적이게 된다는 꿈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어느덧 노년이다.

 

만약 삶이 이렇듯 꿈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노년이라 해도 꿈이 가실 까닭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꿈 접기가 꿈의 현실이 되는 장년기의 뒷자락에서부터 우리는 이미 노년의 삶은 꿈꾸기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것이라고 여긴다. 꿈과 무관한 삶이 곧 삶의 끝 날에 이르는 짧은 자락일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아예 꿈과 이어진 삶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노년은 그렇게 묘사된다.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도 없지 않다. 노년이 되면 바야흐로 진정한 꿈을 꾸어야 하는 시절이라고 애써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노년 이전의 꿈은 그것이 아무리 영롱하고 찬란했다 해도, 그리고 그 꿈을 마침내 그렇게 이루었다 해도, 지금 노년의 자리에서 보면 한갓 물거품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분들은 노년이 되어 지니게 되는 새 꿈이야 말로 지금 여기를 벗어난 영원한 것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찬 것이어서 결코 허망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무한, 영원, 초월, 자연, 처음에의 회귀라는 개념들이 그러한 주장 속에서 넘실댄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에 솔깃하다. 노년이 되면 끝이 보여 초조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서둘러 초연해지고 싶은 희구도 일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노년의 꿈을 일컫는다면 그것은 온갖 것에서 놓이고 풀려 지금 여기를 지우는 가볍고 자유로운 비상(飛翔)이라고 말한다. 죽음이 밀착된 노년에서 이러한 초연함을 꿈꾸는 것은 성숙한 모습으로 일컬어지고, 쉽게 지닐 수 없는 삶의 모습으로 기려진다.

 

그러나 바야흐로 죽음을 의식하면서 이러한 태도를 지니는 삶이란 오직 노년에게 한한 것은 아니다. 노년에 이르렀다는 것이 죽음에 바짝 다가간 징표인 것은 분명하지만 죽음이란 비단 노년의 전유물은 아니다. 죽음은 무릇 생명이 품고 있는 것이어서 삶이 있는 곳이면 바로 거기에 언제나 함께 있다.

 

그렇다면 노년에 이르러 죽음을 맞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서 꿈마저 버리고 삶에서 벗어나기를 희구하는 것은 삶을 고이 다듬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삶을 지레 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는 벌써 젊었을 때나 장년의 시기에 이미 다듬고 있어야 그것이 성숙이지 늙어 죽음의 낌새를 보고 쫓기듯 서둘러 짓는 죽음이해나 죽음맞이의 태도는 오히려 일그러진 체념일 수도 있다. 짐짓 자유로움과 초연함으로 그것을 치장한다 해도 그런 잿빛 그늘이 온전히 가려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노년에 이르러서도 꿈을 꾸며 살아야 한다. 현실에서 발을 떼지 않는 그런 꿈, 그러니까 지금 여기의 내 삶이 온전해지도록 무엇을 하고 싶다든지, 해야 하겠다든지 하는 희구를 지녀야 하고 이를 위한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물론 갑작스러운 ‘길어진 수명’ 탓에 언제부터가 ‘노년’인지를 가늠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그러니 다 끝났다고 꿈을 접은 때도 확연하지 않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꿈을 펼쳐야겠다고 다짐하는 때도 너나없이 같지 않다. 마음이나 몸 형편에 더해 건강이나 재물, 그리고 하고 살아온 일에 따라 노년은 다르게 드러난다. 그러니 이를 금 긋듯 잘라 말한다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오히려 이제까지와는 다른 노년의 꿈을 스스로 지니고 이를 실현하려는 삶을 사는 일은 뜻밖에 쉽고 간단하다. 나 스스로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하는 그때가 바로 그 꿈을 펼치기 가장 적절한 때이고, 그때 지니는 그 꿈의 내용이 곧 자기가 꿈꾸는 그것이기 때문이다.

 

꿈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고 싶은 것, 그것이 꿈이다. 그렇다면 노년의 꿈은 분명하다. 이제까지 힘들게 살아오느라 하고 싶은 것을 못한 것, 그것을 하고 싶다고 마음먹는 일이 꿈이고 그것을 하는 것이 꿈의 실현이다. 그것이 노년의 특권이고 자유이다. 젊음도 장년도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노년은 실은 거칠 것이 없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던데 그 아름다움을 좇아 남은 내 삶이 펼쳐지리라는 생각만 해도 이미 나는 꿈의 실현을 앞당겨 사는 것 같은 희열에 들뜬다. 그러니 망설일 필요가 없다. 머뭇거림처럼 못난 삶은 없다. 이미 충분히 그렇다는 것을 아는데 주저할 것 없이 지금 여기에서 그 꿈을 누리고 실현하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틀림없이 행복할 거다. 그것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마지막 축복일 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이 자유를 누리려 한다면 자칫 그 모습은 추하게 일그러진 삶으로 읽힐지도 모른다. 꿈은 욕심이 아니다. 꿈은 환상이 아니다. 꿈은 욕망의 투사도 아니다. 그것은 삶을 삶답게 다스리는 영롱한 얼이 내는 길을 좇는 일이고, 그러한 삶의 실현을 기하는 일이다. 노년 이전의 삶에서 우리는 이를 혼동하여 얼마나 헛길로 들어서서 헤맸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끝자락에서 이 잘못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노욕(老慾)과 거기에서 말미암은 노추(老醜)는 그러잖아도 오래 일컬어진 노년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꿈을 꾸되 ‘눈 뜬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노년이 갖는 꿈의 특성이다. 눈 감고 질주하는 ‘맹목(盲目)’의 꿈은 때로 노년 이전에는 불가피한 과오로 여겨 용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노년의 꿈이 그러하면 그것은 돌이킬 수 있는 여유가 없다. 그러므로 노년은 꿈을 키우되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자신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세상에 대한 상황적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꿈은 ‘눈 뜬 꿈’이어야 한다.

 

세월이 넉넉하지 않다. 그런데 하지 못한 것을 하고 싶은, 한 것을 더 온전하게 하고 싶은, 간절함이 새 꿈을 부추긴다. 행복한 충동이고 감사한 기회이다. 과감하게 착수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자칫 노욕과 노추로 묘사될 수도 있으리라는 판단이 들면 지체 없이 내 꿈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그 다스림은 다른 것이 아니다. 젊은이고 장년인 든든한 후배들의 성취 속에서 내 꿈의 실현을 새삼 확인하는 일이다. 내가 못내 하고 싶던 것을 기막히게 성취하고 있는 그들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진심으로 부러워하고, 그들의 성취에 내가 깃들 수 있는 행운을 지녔다는 사실에 더없이 감사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들을 무한히 신뢰하면서 내 노년을 보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나은 노년의 꿈의 실현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도 노년은 꿈을 가져야 한다. 꿈이 없다면 이 감격을 겪을 수 없을 거니까.

 

꿈을 꾸지 않는 노년은 가난하다. 그리고 가난은 서럽고 시리다. 그런데 노년을 그렇게 살게 하지 않을 사람은 노년을 사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글·사진 브라보마이라이프 기자 bravo@bravo-mylife.co.kr